금속활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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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금속활자장

국가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金屬活字匠)

활판으로 서적을 인쇄해 내기 위하여 금속을 녹여 주형(鑄型) 부어서 각종 크기의 활자를 만드는 제작기능 보유자.

금속으로 글자를 만드는 사람들

78 년이나 앞선 우리나라의 1455년에 인쇄된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인쇄본인 구텐베르크의 42 성서보다 무려 속활자인쇄본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다. 발견 장소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란 점도 시선을 끌거니와, 세계최초’, 그것도 78이나 앞섰다는 점에서 이목이 번쩍일 만하다.

바로 주인공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로 긴 이름 대신 직지불리는 그것이다. 책은 한말에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를 지낸 플랑시라는 사람이 정식으 구매한 것으로, 단계를 거쳐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흘러들어갔다. 수많 책들 하나로 무수한 세월을 보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서로 있던 박병선의 눈에 띄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유네스코에 등재되기까지 했으니, 직지 둘러 이야기마저 참으로 흥미롭지 않을 없다.이제 우리나라는 명실상부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이다. 그리고 바탕에는 바로 금속활자를 만든 장인들이 있었다.

글자를 인쇄하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청동을 불려 범종, 불상, 동전 등을 주조하 는데 훌륭한 재능이 있었으므로,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조판용의 점착성 물질과 속에 묻는 먹물만 개발하면 금속활자인쇄술은 충분히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금속활자 인쇄술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 않아, 언제 누구에 의하여 어떤 방법으로 금속활자가 주조되고 쇄되었는지에 관하여 있는 자료는 없다.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한 사례는 고려 13세기 전기에 나타나고 있.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있는 최이(崔怡) 기록에 의하면, “ 선문(禪門)에서 가장 긴요한 책인데, 전하는 것이 드물어 얻어 어려워 주자본(鑄字本) 의거하여 고종 26(1239) 다시 새겨 널리 전하게 하였다.” 것이다. 글에 의하여 금속활자가 고종 19(1232) 강화로 천도하기 이전인 13세기 초기 개경에서 이미 만들어져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물 758호로 지정된 책은 비록 주자본을 본보기로 함아 다시 새긴 목판본이기에 전체에 걸쳐 칼자국이 나타나고 있지만, 새김 매우 정교하여 바탕이 주자본의 특징을 능히 파악할 있다. 같이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으나 안타 깝게도 고려는 원나라에게 정치적 지배를 받음으로써 중앙관서의 자인쇄 기능 또한 마비되었다, 그러나 인쇄에 관한 욕구가 완전히 라졌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이에 있었던 실로 중요한 일은,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사찰이 활자를 주조하여 불교서적을 찍어 점이다.

그것이 바로 우왕 3(1377) 7 충청북도 청주시의 흥덕사(興德寺) 라는 절에서 찍어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직지심체 요절혹은 직지라고도 부르는 책은 고려 말에 국사를 지냈던 백 운 스님이 선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를 모아 만든 이다. 중심 주제인 직지심체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심성이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직지 본래 (), () 2권으로 인쇄되었으나 상권은 아직까 발견되지 않았고, 하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목판으로 다시 간행한 책이 보물 1132호로 지정되 남아있다.

한편 고려의 현존 활자로는 개경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 활자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활자 꼴이 가지런하지 않고 글자획이 고르지 않으며, 또한 활자 변의 길이가 앞뒤로 차이가 있다. 이는 밀랍주조법에 의한 특징을 타내 준다. 활자는 뒷면이 타원형으로 옴폭 파져 그곳에 밀랍이 차서 굳으면 인쇄 도중 움직이지 않고, 또한 동의 소비량을 줄이는 계로 개량한 점에서 주목된다. 고려 금속활자 주조 조판 기술사 구에서 매우 중요한 실물 자료라고 하겠다.

조선시대에 와서 금속활자는 세계 인쇄문화사상 유례를 찾아볼 없을 만큼 크게 발달하였다. 태종 3(1403) 처음으로 주자소(鑄字) 설치하고 수개월에 걸쳐 금속활자를 주조했는데, 이것이 바로 계미자(癸未字)이다.

활자의 주조술이 밀랍을 이용한 주조법에서 주물사를 이용한 주조 법으로 개량되었기 때문에 활자가 비교적 고르고 동일한 글자의 모양 같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고려의 활자와 비교해 때도 활자 뒷면을 뾰족하게 개량하여 밀랍에 꽂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직 기술이 미숙하여 인쇄능률이 저조했지만, 이후 금속활자 주조술의 개량과 인쇄술 발달의 단계가 되었다.

계미자를 사용한 현전하는 것이 바로 국보 149호의 동래 선생교정북사상절이다. 계미자는 사용하는 기간이 짧기 때문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계미자 판본은 매우 희귀한 편이다. 더욱이 책은 미자를 사용한 다른 유물들보다 인쇄상태가 정교하고 선명하기에 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세종 2(1420) 이르면 경자자(庚子字) 만들어지며 금속활자도 다음 단계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계미자의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해 그보다 작으면서도 글자획을 박력 있고 예쁘게 주조한 것이며, 조판용 동판과 활자를 평평하고 바르게 만들어 서로 맞도록 개량하였다. 그리하여 경자자는 인쇄할 밀랍을 사용하지 않아도 활자가 움직이지 않고 매우 글자획이 바르게 되어 인쇄 능률이 크게 올랐다.

현존하는 책으로는 노자권재구의 있다. 책은 중국 ()라의 임희일(林希逸) 저술한 노자주석서를 조선시대에 경자자 판각하여 엮은 책이다. 노자 내용을 말로 설명하듯이 쉽게 술한 문장으로 풀어서 엮은 것으로 초학자들이 이해하기 쉽다 평을 받았다.

조선시대에 번째로 개량된 활자는 갑인자이다. 앞서 주조한 자자의 글자체가 가늘고 빽빽하여 조금 크고 해정한 필서체 활자를 만들어 것이다. 활자와 작은 활자의 크기가 서로 같고 네모가 평정하여, 옆줄이 정연하게 일직선을 이루고 글자 사이도 일정한 간을 여유 있고 늠름하게 유지하고 있다. 조판에서는 대나무 등을 용하여 데를 메우는 완전조립식으로 발전시켰다. 먹물도 진하고 묻게 만들어 내어, 한결 까맣고 윤이 나서 인쇄가 아름다웠다.

갑인자를 사용한 대표적인 유물 하나가 바로 근사록이다. 조선 시대 학자들의 필독서였던 근사록 14말에 세종 18(1436) 6월에 김문(金汶) 발문이 있어 인출연대가 분명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는 점에서 서지학 성리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세종 이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의 활자가 만들어 졌다. 활자 계보에 오른 금속활자만도 종류가 무려 35종에 이른다. 우리나라 명필가의 글자체를 바탕으로 활자가 17 있는가 하면, 중국 역조의 간본 글자체를 바탕으로 것이 18종이나 있다. 활자를 재료별로 보면, 동활자가 주로 만들어졌고 연활자와 철활자 주조되었다. 활자를 주조한 주체별로 보면, 주로 관서에서 만들어 냈지만, 민간에서 만들어 활자도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활자가 왔지만 기술은 갑인자를 능가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세종 때는 자왕국으로 군림할 있는 터전이 구축된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글자를 만들다

금속활자장은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서 각종 서적을 인쇄하는 인을 말한다.

한국의 금속활자는 주조(鑄造) 기법으로 제작된다. 제작 과정은 크게 글자본 만들기, 원형 만들기, 주조, 마무리작업의 과정으로 뉘며 주조기법에 따라 밀랍주조기법과 모래주조기법으로 나뉜다. 랍주조기법은 주로 초기에 쓰였으며, 활자 하나하나를 밀랍으로 만들 때문에 같은 글자라도 활자마다 모양과 크기가 달라서 조판 상태 가지런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모래주조기법은 조선시대의 주갑인자 이후 보편화된 방법이다. 주물틀을 만들어 위쪽에 구멍 쇳물을 부어서 활자를 주조한다. 기법은 활자의 크기와 모양가지런하므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근대에는 위의 가지 전통기법을 토대로 현대화된 장비를 활용하여 제작한다. 1996년 오국진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복원해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지병으로 사망한 임인호가 뒤를 이었다.

임인호는 1997 10 즈음 국가무형문화재 101 금속활자장 능보유자인 () 오국진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금속활자를 배웠다. 짬나면 한번 들러 보라 스승의 말을 7년을 꼬박 각칼과 쇳물, 활자와 씨름한 끝에 2004 3 스승의 뒤를 이을 전수 교육조교가 되었다.

임인호는 스승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 복원에 힘을 쏟았다. 스승이 타계한 뒤를 이어 200912 2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그는 배우면 배울수 , 익히면 익힐수록, 알면 알수록 오묘하고 신비로운 것이 활자라며 혼을 담아 천년 뒤에도 살아 꿈틀거리는 우리 활자를 만들고 . 세계에서 유일한 금속활자 주조법을 지키고 명맥을 이어 나가는 것을 삶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있다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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