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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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경복궁 스토리

 

경복궁 스토리

광화문

이곳은 경복궁의 남문, 광화문이다. 요즘은 광화문 앞 세종로 양쪽으로 정부청사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다. 조선시대에도 비슷했다. 광화문 앞은 의정부와 이조, 형조, 예조 등 육조 건물이 들어섰던 관청거리였다. 조선의 신하들은 해치를 바라보며 오늘도 공명정대하게 일을 하리라 다짐을 했다. 광화문은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는 불에 타고, 일제강점기에는 해체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는 수모를 당하고 한국전쟁 때는 포화를 맞았다. 그러다가 1968년 복원하였으나 목재가 아니라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잘못된 위치에 세워지고 만다.  다행히 경복궁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현재 광화문은 1867년 고종임금님이 중건 했을 당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영추문

이곳 영추문은 경복궁의 서쪽 대문이다. 경복궁 안에 있는 관청에서 근무하는 문무백관들은 주로 이 영추문으로 출입했다. 조선 초기, 경복궁에는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당시 태조임금은 둘째왕비 신덕왕후 강씨가 낳은 막내아들 방석왕자를 사랑하여 그를 세자로 삼았다. 그러자 장성한 첫째 왕비의 아들들이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세자 방석을 제거하기 위해 비밀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그때 그들이 드나들던 곳이 바로 이곳 영추문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손꼽히는 연산군은 근정전에서 이곳 영추문에 이르는 구역을 가시로 막아서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경루 연못 서쪽에 만세산이라는 인공산을 만들고 연못에서 뱃놀이를 하며 즐겼다. 

건춘문

이곳 건춘문은 경복궁의 동문이다. ‘봄이 시작되는 문’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세자를 비롯한 왕실가족과 종친들이 드나들던 문이다. 고종임금이 이 문을 통해 몰래 경복궁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일명 아관파천이었다. 건춘문 앞에는 늙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조선시대부터 줄곧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어린 세자가 배동들과 노는 모습, 미우라의 지시를 받은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 숨어 들어오던 모습, 건춘문을 빠져나가던 고종임금의 모습. 은행나무는 그 모습들을 다 보았을 것이다. 

신무문

이곳은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이다. 북쪽은 겨울과 죽음, 그리고 강한 음기를 상징한다. 그래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은 늘 잠가 두었다. 북쪽의 음기가 경복궁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드물게 이 문이 열리는 경우도 있었다.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낼 때, 그리고 임금이 지금의 청와대쪽에 있는 활터로 가려고 할 때면 잠깐씩 신무문을 열곤 했다. 

흥례문

여기는흥례문이다. 흥례문 앞에서는 궁을 지키는 수문장들이 임무를 교대하는 의식을 했다. 야간에는 상대방을 확인하기 위해 암호를 주고 받았는데, 임금이 친히 암호를 정한다. 암호는 매일 바뀌었다. 지금도 경복궁이 열리는 시간 매 정시 수문장 교대식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흥례문에는 가슴 아픈 사연도 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을 때 흥례문을 없애버리고 이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광복이 되고 나서도 조선총독부 건물은 그대로 이 자리에 있었고 정부청사로도, 박물관으로도 사용되었다. 1995년, 마침내 우리 정부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허물고 흥례문을 복원하였다. 이 문에는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우리 국민의 의지가 담겨 있다. 

동십자각

동십자각은 외로운 건물이다. 이 건물은 높은 망루처럼 생겼는데 이상한 점은 이 건물로 들어갈 문이 없다. 지붕에 잡상과 단청이 있으니 궁궐의 한 건물 같은데 어떻게 혼자서만 나오게 됐을까?  동십자각은 원래 경복궁 담장 안에 있었던 건물이다.  궁궐 안과 밖을 경비하던 요새같은 망루이다. 옛날에는 이 망루로 올라가는 계단이 담장 안에 있어서 여기로 군사들이 오르내렸다.  화살과 총탄을 막아줄 여장이라는 방호벽도 있어서  전투시설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의 동쪽 담장이 훼손됐다. 앞쪽 성벽도 도로를 넓히느라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몸체인 경복궁과 따로 떨어져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제교

흥례문에 들어서면 돌을 깐 길이 3개로 나뉘어 있다. 약간 도드라진 가운데 길은 임금님만이 지나갈 수 있었다. 임금이 아닌 자가 이유 없이 이 어도 위를 걸어가면 매 80대를 맞았다고 한다. 어도를 따라가 보면 돌다리가 하나 나타난다. 다리 밑으로는 물이 흐르는데 이 물을 ‘금천’이라 불렀다. 금천의 ‘금’은 ‘금지한다’, ‘삼간다’라는 뜻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임금의 구역이니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모든 궁궐에는 금천과 금천교가 있다. 경복궁의 금천교는 영제교라 불렸다. 영제교 밑에는 특이하게 생긴 동물이 네 마리 있다.  궁궐에 들어오려는 사악한 기운을 막는 것이 이 녀석들의 임무이다. 

기별청

기별청은 궁궐 내의 우체국같은 곳이다. 기별청은 유화문 옆에 딸린 작은 꼬마같은 모습이다. 유화문은 원래 임금님을 만나려 드나들던 관리들이 주로 출입하던 문이다. 여기를 지나면 임금님을 뵙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별청에서는 미리 출입하는 분들을 통제해서 순서를 정해주기도 하고 오늘 무슨 중요한 일이 있는지 그날의 소식지인 기별지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했다. 관리들은 유화문과 기별청을 지나면서 임금님이 오늘 무슨 일에 관심이 있으실지, 중요한 일은 무엇일지 알 수 있게 되고 마치 현대인들이 아침신문을 읽는 것처럼 기별지를 읽었을 것이다. 

근정문

이곳은 근정전으로 향하는 근정문이다. 이 문 앞에 있는 계단을 주목해 보면 답도이다. 임금님의 길이다. 그런데 계단이 아니여서 밟고 올라가기가 불편해 보인다. 비나 눈이 오는 날은 더 곤란했을 것이다. 임금님은 가마를 타고 이 답도 위를 지나가셨다. 답도에 새겨진 새는 바로 봉황이다. 봉황은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새라고 한다. 

근정전 조정

근정전 앞 넓은 마당을 ‘조정’이라 부르는데, 여기에서 임금님의 즉위식, 임금과 세자의 책봉식, 사신맞이, 과거시험 같은 큼직큼직한 행사들이 열렸다. 조정의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돌들이 보이는데 품계석이다. 근정전을 바라보고 오른쪽 품계석은 문신들, 왼쪽은 무신들 자리이다. 전체 조회나 나라의 큰 행사가 있을 때 대신들은 자기 품계에 해당하는 품계석 옆에 섰다. 영의정을 비롯해 품계가 제일 높은 정1품부터 임금과 가까운 곳에 섰다. 그런데 조정 바닥이 좀 울퉁불퉁하다.  돌을 매끄럽게 다듬어 놓으면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그러면 근정전에 앉아 있는 임금님은 눈을 찌푸리고 대신들을 내려다보게 된다. 게다가 대신들이 신은 가죽신은 바닥이 반들거려서 미끄러지기 쉬웠다. 그런데 바닥이 울퉁불퉁하면 미끄러지는 일이 별로 없다. 또 평소에도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행동거지를 더욱 조심하게 된다.  근정전 앞마당에는 이렇게 지혜로운 조선 석공들의 배려가 숨어 있다. 조정 바닥에는 이상한 고리가 있다. 조정에서 행사를 할 때 햇빛을 가리기 위해 큰 천막을 쳤는데 그때 천막의 줄을 잡아매던 고리다. 

근정전

이곳이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이다. 근정전 앞에 두 개의 기단이 보이는데, 이것을 ‘월대’라고 한다. 이 곳에는 서른여섯 개의 동물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임금님의 공간에 사악한 기운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수호병 역할을 한다.  지붕 위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손오공 일행들이 근정전을 지키고 있는데 잡상이라고도 불린다. 여기 있는 동물들은 모두 쌍쌍이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자손이 번성하라는 뜻이다.  근정전 기단 위에는 무쇠그릇이 놓여 있는데 ‘드므’라고 한다. 드므에는 늘 물을 담아 두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옛날 남산에 불귀신이 살았는데, 얼굴이 아주 흉측하게 생겼단다. 한번은 불귀신이 경복궁에 불을 내러 왔다가 드므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 혼비백산 달아났다고 한다. 목재건물은 불이 나면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화재가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이곳에 드므를 두었던 것이다.

근정전내부

이 곳은 조선 권력의 최고점인 근정전 내부다. 밖에서 보면 근정전은 2층으로 보인다. 그런데 안을 들여다보면, 한 층으로 되어 있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 올려다보면 천장에 매달려 있는 용 두마리가 보이는데 그 용의 발톱이 7개이다. 발톱이 4개인 용, 사조룡이 조선 임금의 상징이고 발톱이 5개인 오조룡은 중국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1867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칠조룡을 근정전 천장에 매달았다. 조선의 자주와 자존을 염원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근정전 중앙에 놓인 의자는 임금의 의자인 어좌다. 어좌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 소나무, 폭포, 파도 등이 그려져 있는 병풍이 있다. 이 병풍은 임금이 계신 곳을 상징하며 어좌 뒤에는 항상 이 병풍이 펼쳐져 있다. 병풍 가운데를 보면 문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임금님이 근정전에 오실 땐 뒷문으로 들어오셔서 이 병풍의 문을 열고 나오셨다. 

사정전

이곳은 임금님이 정사를 보시던 사정전이다. 조선의 정치는 매일 아침 이 곳 사정전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서 상참의, 즉, 오늘날의 국무회의가 열렸다. 임금님이 대신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옆에서 무언가 열심히 쓰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기록하는 사관과 주서이다.  사관과 주서의 기록은 임금님도 볼 수 없었다. 사관과 주서는 기록에 자기 이름을 적지 않아도 됐고. 임금님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공정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사관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으로, 주서의 기록은 승정원일기로 엮어졌다. 객관성과 공정성, 472년의 장대한 기록, 이러한 점을 인정해 유네스코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이곳, 사정전은 조선의 중요한 역사가 이루어지고 세계인이 보존해야할 유산이 탄생한 곳이다. 

강녕전

이곳은 임금의 처소, 강녕전이다. 사정전이 나랏일을 돌보는 일터라면 강녕전은 편안하게 쉬시는 곳이다. 왕비는 이곳에 함께 기거하지 않았다. 유교의 법도에 따라 각기 다른 전각에서 생활했다.  조선의 임금들은 생각만큼 크고 화려한 공간에서 생활하지 않았다. 솔선수범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조선 19대 숙종임금님은 천둥이라도 치면 자신이 언로를 막은 것은 아닌지, 인사를 잘못한 것은 아닌지 정치를 잘못해서 백성이 곤궁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강녕전은 모두 9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방과 방 사이에는 모두 문을 만들어 두어 서로 통하게 하였다. 또 가운데 마루 쪽의 문은 들어 올릴 수가 있다. 여름에는 문을 들어 올려서 시원하게 바람을 들이고, 겨울에는 문을 내려 따뜻하게 지냈다. 우리 건축만의 특징이다. 또한 강녕전은 근정전처럼 월대가 있다. 여기에서 왕실 가족들의 잔치를 열기도 했다. 

교태전

이곳은 조선 왕비의 공간인 교태전이다. 교태란 ‘음’과 ‘양‘의 조화를 뜻한다. 조선의 왕비는 국모였다. 그 인생은 세자빈이 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세자가 10살 전후가 되면 조선왕실에서는 세자빈을 간택했다. 세자빈을 뽑을 때 가장 중시한 것은 ‘덕망’과 ‘기품’이었다. 대비와 왕비를 비롯한 왕실 어른들은 규수들이 음식 먹는 모습, 말하는 모습 등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러나 정작 신랑이 될 세자는 이 과정에 간여할 수 없었다. 세자빈으로 간택된 규수는 곧장 세자빈 교육과정을 밟는다. 그리고 좋은 날을 잡아 가례를 올렸다. 이때 세자빈은 나무 기러기 한 쌍을 받는다. 기러기는 평생 짝을 바꾸지 않을 정도로 금슬이 좋은 새라고 한다. 기러기처럼 세자와 세자빈 역시 백년해로하라는 뜻이지다. 가례를 치렀지만 아직은 형식적인 부부다. 정식으로 합방을 하게 되는 것은 두 사람이 15, 6세가 되었을 무렵이다. 일단 궁에 들어오게 된 어린 세자빈은 언제 친정을 방문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  교태전 뒤뜰에는 ‘아미산’이라는 작은 후원이 있다. 

흠경각

이곳은 흠경각이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에게 때를 알려 준다는 뜻이다. 조선은 농업국가였다. 정확한 때에 씨를 뿌리고 거두어야 농사를 망치지 않았다. 자칫 그 시기를 놓치면 백성들은 배를 곯을 수 밖에 없었다. 백성들에게 정확한 절기와 시간을 알려주고자 한 세종임금님은 과학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관노비 출신의 장영실을 등용해서 그에게 일러 일종의 과학관을 만들게 했으니, 그것이 바로 이 흠경각이다. 이곳에는 자동 천문시계, 해시계를 비롯한 각종 기상관측 기구들을 모아 두었다. 장영실과 여러 과학기술자들은 이곳에 모여 연구를 했다. 흠경각을 임금의 처소 가까운 곳에 둔 것을 보면 세종임금님이 얼마나 과학을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자경전

이곳은 자경전이다. 임금의 어머니를 위한 공간이다. 자경은 ‘어머니에게 경사가 있기를’이라는 뜻이다. 조선은 유교사회로, ‘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으며 자경전은 바로 그런 효도의 상징으로 지은 전각이다.  자경전에는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이 많다. 우선, 중전의 처소에 있는 담만큼 아름다운 꽃담이 있고, 자경전 뒤뜰에는 곱게 구운 벽돌 위에 십장생 무늬를 얹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조선은 여성들의 정치활동을 엄격하게 금했으나 예외인 경우가 있었으니 바로 대비의 “수렴청정”이다. 어린 임금이 보위에 오르면 왕실 최고 어른 자격으로 국정을 처리한 것이다. 조선 역사에서 다섯분의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다. 자경전은 고종임금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고종임금을 양자로 삼아 왕위에 오르게 해 준 신정왕후를 위해서 만든 전각이다. 

경회루

이곳은 경회루다. 조선의 누각 중에서 가장 큰 곳이고 과거에는 훨씬 화려했다고 한다. 돌기둥마다 꿈틀대는 용이 새겨져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고 270여년이 지난 고종임금님 때에 다시 지어졌다. 그때 화재로부터 경회루를 지켜 달라는 의미로 청동 용 두 마리를 연못에 넣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1997년 경회루 연못 공사때 물을 모두 뺐더니 실제로 청동용이 나왔다. 발견된 용은 현재 고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가까이서 보면 기둥 이곳저곳에 패인 부분이 보인다. 한국전쟁 때 총탄의 흔적이다. 경회루로 들어가는 작은 다리 양편에는 쇠를 먹어 버려 경복궁을 보호한다는 불가사리가 앉아 있는데 한 마리의 코가 훼손되었다. 이곳에서는 왕실의 화려한 연회가 많이 열렸다. 중국 사신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리기도 했고, 경회루 앞에서는 활쏘기 대회나 무과시험이 펼쳐지기도 했으며 가뭄이 들면 여기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태원전

이곳은 태원전이다. 태원전은 임금의 초상화, 즉 어진을 모셔놓던 곳이다. 태조와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순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었다. 또, 이곳은 국상을 치른 후 신위를 모시던 혼전, 상여가 나가기 전에 관을 모시던 빈전으로 사용되었다. 일본 낭인들 손에 비참하게 승하한 명성황후의 관도 이곳에 머물렀다.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서 빈 관으로 모셨다고 한다. 조선의 왕들은 그리 오래 사시지는 못했다. 가장 단명한 임금은 단종임금으로 17세, 그리고 8대 예종임금이 20세로 생을 마감했다. 가장 장수한 임금은 영조임금으로 83세까지 살았다. 태원전 양쪽에는 세답방이 있었다. 세답방은 빨래와 다듬이질을 도맡아하는 곳이다. 

집옥재

이곳은 집옥재 일원이다. 집옥재는 ‘보물을 모아 놓은 곳’이란 뜻을 가진 건물인데 이 곳에는 4만여권에 이르는 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서양의 기계 문명,과학 서적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왕립도서관 정도 되었다. 그 책들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다. 세 건물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오른편의 협길당은 전형적인 조선집이지만 가운데 집옥재와 왼편 팔우정은 왠지 이국적 정취가 풍긴다. 이 건물은 청나라의 건축양식을 취하고 있다.  용마루의 용도 경복궁 다른 전각에서 본 용과는 다르다. 조선 건축에서는 용의 머리를 얹어 놓는데 집옥재는 몸을 휘감고 올라가는 용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집옥재를 지키는 돌짐승은 영락없는 조선식이다. 동글동글 주먹코에 헤벌쭉 웃는 얼굴. 조선 특유의 해학미가 느껴지는 조각기법이다. 고종임금은 청나라의 신식 문물을 들여오면서 청나라양식의 건물을 지었다. 그럼에도 한 쪽에는 온돌이 놓인 조선집을 나란히 앉혔다.  구한말 이 곳에서 고종임금은 미국, 일본 공사, 오스트리아 사신들을 접견하고 국서를 전달받았다. 당시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동학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조선의 운명을 논하는 숨가쁜 회의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 주변은 1961년 이후 청와대 경비를 담당하는 수도경비사령부가 머물면서 보안과 경호를 이유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했다. 그러다가 2006년,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과 함께 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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