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숨은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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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승지

창덕궁의 숨은명소

 

아름다운 창덕궁 (사적 제122호)

창덕궁은 1405년 (태종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다.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였으며, 창덕궁은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다. 그 후 창덕궁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는다.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으나 크고 작은 화재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특히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손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한 강녕전 동·서행각 등의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가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를 편 궁궐이다.  북한산의 매봉 기슭에 세운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히 많다.  자연의 산세를 갈려 건축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였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조경을 보여주는 창덕궁의 후원을 통해 궁궐의 조경양식을 알 수 있다. 후원에는 160여 종의 나무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300년이 넘는 나무도 있어 원형이 비교적 충실히 보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조경이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장소이다.

돈화문

이곳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이다. 돈화(敦化)란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감화시킨다’는 의미로, 덕치를 숭상한 조선 임금(왕조)의 의지를 담고 있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  월대라고 하는 돌로 쌓은 높은 대 위에 올려 있고, 그 한가운데 임금의 길인 어도가 길게 뻗어 있는 것을 볼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다른 궁궐의 문은 모두 세 칸짜리인 데 반해 돈화문만 다섯 칸이라는 점이다.  옛날에는 중국 황제만 다섯 칸짜리 대문을 쓸 수 있었다. 때문에 중국을 의식해 양쪽 끝에 문을 닫아 막아 놓았지만 외관만은 크고 장중하게 만들려고 했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돈화문은 임금의 출입이나 국가의 큰 행사 때만 사용되는 상징적인 문이었고, 평소 신하나 군사들은 좌우 담장에 있는 금호문이나 단봉문, 경추문 등의 작은 문으로 출입했다.
궁궐 출입에는 엄격한 법도가 있었고 반드시 궁에서 발급하는 출입증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구 선원전

이 건물은 선원전이다.
선원전은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임금이 궁궐을 옮겨 갈 때는 이곳의 어진부터 챙겨 받들어 모시고 갔다고 한다.
그렇게 귀중히 여긴 어진을 모신 곳이니 궁궐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지만 선원전의 의례는 매우 검소하고 간단하게 했다.
조상을 모시는 일이 행여 후대에 부담이 되고 폐단으로 남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선원전 앞 뒤 양쪽에 딸려 있는 작은 건물 네 채는 제사 지낼 때 준비를 하던 곳이었는데, 최근에 복원되었다.
여기 이외에 후원에도 선원전이 있다.  1921년,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옮긴 뒤부터 이곳을 구선원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선문

진선이란 임금께 바른말을 올린다는 뜻이다.  임금이 계시는 정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므로 올바른 정치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영조 때엔 이곳에 신문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신문고는 커다란 북이었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백성이 신문고를 두드려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진선문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온다.  저 앞으로 왕비전으로 가는 숙장문이 보이고 왼쪽 가운데에 임금이 계시는 인정전으로 가는 인정문이 있다.  마당이 살짝 숙장문 쪽으로 좁아지는 사다리꼴 모양이다.  여느 궁궐과 다르게 이렇게 반듯하지 않은 마당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뿐만 아니라 보통 궁궐은 정문에서 임금이 계신 곳까지 일직선으로 뚫려 있지만 이곳 창덕궁만은 돈화문을 들어와 90도로 꺾어져 금천교를 건너야 하고 임금이 계신 인정전에 가기 위해서는 다시 인정문 쪽으로 90도를 돌아서야 들어갈 수 있다.  여기에서 자연지형과의 조화를 중요시한 창덕궁의 건축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인정전

이곳은 임금이 계시는 인정전이다.  국가의 주요 행사 대부분이 여기 인정전에서 치러졌다.
왕의 즉위식, 세자책봉, 왕족의 혼례, 대왕대비의 회갑 같은 경사스러운 일뿐 아니라, 신하들의 새해 인사와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국가적인 행사도 이곳에서 열렸다.

인정문

인정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다. 어진 정치를 베풀기 위해 임금은 스스로 인격을 도야하고 완성해야 한다.
인정이라는 현판 앞에 서면 임금은 백성들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얼마나 어진 정치를 펼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았을 것이다. 이 문과 문 안의 전각에 모두 인정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왕실이 존재하는 의미를 나타낸, 대표적인 장소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치러졌던 가장 중요한 의식은 임금의 즉위식이다. 임금의 즉위 장소는 선왕이 승하한 궁궐의 법전 정문에서 하는 것이 관례였다.  선왕이 창덕궁에서 승하하면 다음 임금은 반드시 창덕궁의 법전인 인정전 정문에서 즉위하게 되는 것이다.  대개 선왕이 승하하고 엿새째에 즉위식이 이루어지는데, 상중에 이루어지는 즉위식이라 간소하게 치렀다고 한다.
인정문은 또한 매 5일마다 조정의 모든 관리들이 모여 임금에게 예를 올리는 조참의식을 치르는 장소이기도 했다.

선정전

이곳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인 선정전이다.
선정(宣政)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 는 뜻으로 이곳에서 임금은 신하와 국사를 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사신을 만나기도 했다.
조선 초에는 왕비가 이곳에서 경로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잠업을 권장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선정전은 창덕궁에 남은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청기와는 아라비아의 푸른 안료와, 중국의 기술을 이용한 비싼 건축 재료였다.
연산군은 이곳과 인정전을 청기와로 덮으려 했지만, 이듬해 왕위에서 쫓겨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광해군 역시 청기와 때문에 사치스럽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으니 검소함을 미덕으로 생각한 조선답다.

희정당

이곳은 임금의 집무 공간이자, 임금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희정당이다.
임금은 이곳에서 자유롭게 신하를 접견하고 학문을 논했다.
희정당은 화재로 네 번이나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20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전각 곳곳에서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장식을 볼 수 있다.
동궐도에 따르면 오래 전 희정당 마당에는 하월지라는 연못이 있었고 그 남쪽에 제정각을 세워 천체를 관측할 수 있는 선기옥형을 두었다. 임금의 집무실 바로 앞에 천체 관측 기구를 두었다는 것은 하늘의 도를 본받아 바른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하다.
인조와 숙종은 희정당에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였고 정조는 여기서 성균관 시험 합격자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금천교

이곳은 금천교다.  태종11년인 1411년에 건립된 것으로 서울에 있는 석교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금할 금(禁) 내 천(川)을 써서, ‘아무나 함부로 건널 수 없는 다리’라는 뜻과, 비단 금(錦)자를 써서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다리’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대신들은 이 맑은 물 위에 바깥세상의 더러움과 사심을 모두 털어버리고서야 임금이 계신 전각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곳은 궁중의식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고, 다리 아래 흐르는 물은 불 끄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기도 했다니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고 하겠다.  교각 남쪽 면을 보시면 상서로운 동물 모양의 석상이 있다.  반대편 북쪽엔 현무를 상징하는 거북 모양의 돌조각이 있고, 두 교각 사이의 면석에는 귀면상이 부조돼 있다.  이 조각들은 화귀와 사귀를 물리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말 그대로 나쁜 기운이 다리를 건너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이다.
가운데 유난히 넓은 길은 어도라 해서 임금만이 다닐 수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좌우의 협도를 통해서만 지날 수 있었다.

동편 궐내각사

조선시대 많은 관청 중에 임금 가까이 궁 안에 두었던 관청을 궐내각사라 하고, 궁 밖에 두었던 것을 궐외각사라고 한다.
동궐도를 보면 빈청에서 선정전으로 가는 길 좌우에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이 건물들을 인정전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편궐내각사라고 했다. 특히 빈청에서 선정전으로 향하는 길 왼쪽에는 대청, 은대 등 언론과 관련된 기관이 있었다.
대청은 궁궐 밖에 있는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이 임금에게 아뢸 일이 있을 때 모여서 대기하던 곳이었다.
원래는 따뜻한 온돌방이었는데, 추운 날씨에 모여앉아 임금의 잘잘못을 따지느라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지자 숙종이 온돌을 없애 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사간원과 사헌부가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면 서편궐내각사의 홍문관까지 합세하여 대궐 문 앞에 엎드려 몇날며칠 임금의 허락을 기다릴 정도였다고 하니, 언론을 중요시했던 조선시대의 특징이 느껴진다. 같은 지역에 있던 은대는 승정원의 별칭인데, 임금의 명령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기록하고 관리하던 기관이다.
이 기록들이 오늘날 승정원일기로 전해지고 있다. 승정원은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과 같은 기관이다.
조선의 행정 부처는 6조라 하여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가 중심이 되는데, 승정원 장관인 도승지를 포함해 모두 여섯 명의 승지가 각각 6조의 일을 맡아 처리했다.  임금을 견제하고 왕명의 출납을 관장했던 왼쪽의 궐내각사에 비해 선정전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는 임금의 실생활을 돕는 기관들이 있었다.
궁중 음식 재료를 공급하던 공상청이라든가 내시들이 거처했던 내반원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빈청에서 선정전까지 소나무 몇 그루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서편 궐내각사

조선시대 많은 관청들 중에서 궁궐 안에 세운 것을 궐내각사라 하고 궁궐 밖에 세운 것을 궐외각사라고 하였다.
궁 안에 두었다는 것은 임금님 가까이 두었다는 뜻이니 그만큼 중요하며 임금의 명을 즉시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서편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창덕궁엔 또 다른 궐내각사가 있었다.
인정전 남쪽과 동쪽에도 각각 궐내각사가 있었으나 거의 남아있는 흔적이 없고, 지금 여러분이 보는 인정전 서편 궐내각사만 남아있다.
내각이라 쓰인 이곳과 금천 동쪽 담 안으로 보이는 건물들도 함께 서편 궐내각사를 이루고 있다.
특이하게도 중간에 냇물이 흐르는 구조를 띠고 금천의 동쪽엔 옥당과 약방이 금천의 서쪽엔 규장각과 검서청이 있었다.
내각은 규장각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대조전 일대

이곳은 임금의 처소인 희정당 뒤편에 자리 잡은 대조전이다.
대조전은 임금과 왕비의 침전이다. 대조란 큰 공을 이룬다는 뜻으로 현명한 왕자의 생산을 한다.
대조전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임금은 용으로 상징되므로 또 다른 용, 즉 용마루가 임금이 자고 있는 침전을 누르고 있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조전 앞마당을 보면 대조전을 빙 둘러 크고 작은 방들이 있는 행각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곳에서 임금과 왕비를 모시는 많은 상궁이나 궁녀들이 생활했다고 한다. 툇마루를 놓아 이동하기 쉽게 되어 있다.  대조전 월대 위엔 역시 드므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전기로 불을 밝히는 전등이 옆에 서 있다. 대조전에는 전등뿐만 아니라 유리문, 온돌대신 쪽마루가 깔려 있다. 이는 1917년 일제 강점기시절, 화재로 이곳이 모두 불타버린 후 일본인들이 서양식으로 다시 지었기 때문인데, 대조전의 옛모습이 많이 사라져 아쉽다.

경훈각 일대

이곳은 대조전 뒤편에 위치한 경훈각이다.
경훈각은 원래 2층 건물이었는데, 대조전 화재 때 같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경훈각 내부엔 바다 위를 날고 있는 네 마리의 학을 그린 조일선관도와 세 신선의 나이 자랑을 주제로 그린 삼선관파도가 걸려 있다.경훈각 앞마당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  창덕궁 곳곳에는 맑은 물이 나는 우물이 여러 개가 있었다.
그 중 대조전 뒤에 있는 이 우물은 왕비가 직접 감독할 정도로 깨끗하게 관리했다고 한다.

성정각 일대

궁궐의 동쪽, 동궁은 세자의 공간이다.
장차 임금이 될 세자는 떠오르기 전의 태양 같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금 보는 곳이 세자의 공부방인 성정각이다. 성정이란 유교경전에 나오는 이상적인 정치 원리의 하나로, 사물의 도리를 깨달아 거짓을 버리고 바른 것을 취한다는 뜻이다.
세자는 이곳에서 하루 세 차례 유교경전 수업을 받았고, 예법, 악기 연주, 활쏘기, 말타기, 붓글씨, 셈하기 등 여섯 가지 과목을 배웠다.  세자의 교육은 시강원에서 담당했는데, 학습한 실력을 정기적으로 평가하여 성적이 좋지 않으면 임금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내의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안마당에 있는 사각의 돌절구가 바로, 당시의 흔적이다.
성정각 옆에 직각으로 붙어 있는 작은 누각이 있다.  앞쪽엔 보춘정, 옆에는 희우루라는 현판이 함께 붙어 있다.
몇 달 동안 계속되는 가뭄 속에서, 정조가 이곳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했을 때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한다. 희우(喜雨), 기쁜 비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이다.

승화루 일대

꽤 높게 자리한 승화루에서는 창덕궁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다양하고 방대한 서적을 소장한 도서관이다.
중희당에 머물던 세자는 칠분서와 삼삼와를 통해 승화루로 가서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이 승화루에 보관되었던 도서 목록이 <승화루서목>이다. 승화루서목에는 서책뿐 아니라, 한국 중국의 서화가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서지와 서화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낙선재 일대

사대부 집이라기엔 너무 고고하고 궁궐이라기엔 너무 질박한 이곳은 낙선재다. 화려한 단청 한 자락 칠해진 곳이 없는데도 담백한 농담의 수묵화처럼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공간이다.  낙선재는 헌종임금이 후궁인 순화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면서 사생활 공간으로 지었던 것이다.  마당 한가운데로 튀어나온 누마루와 그 안에 둥그런 만월문이 눈길을 끈다. 서화를 사랑해서 많은 서화 집을 모았다던 헌종임금이 그 뛰어난 글과 그림들을 어디서 감상했을지 상상이 된다.

상량정 일대

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 수강재 뒤편에는 저마다 자그마한 후원이 있다. 이곳 후원엔 정자가 하나씩 있다.
낙선재 후원에 있는 아름다운 정자는 상량정이다. 본래의 이름은 평원루라고 한다.
먼 나라와 사이좋게 지낸다는 뜻으로 이 정자가 지어지던 19세기를 전후하여 서양의 여러 나라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의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바로 옆에 보이는 북행각은 책을 보관했던 서고였다. 상량정 서편 담장에는 둥그런 만월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승화루와 연결된다.

부용정 일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고대 우주관을 반영한 네모난 연못 속의 동그란 작은 섬.
부용지는 우리나라 전통 연못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 두 다리를 담그고 서 있는 부용정 기둥에는 주련마다 아름다운 시구가 적혀 있다.
부용지의 연꽃 향기는 사향처럼 십리에 퍼지고,
연꽃의 맑고 깨끗한 모습은 부처님의 상을 나타내며,
넓은 잎은 신선들의 우산이 되고,
그 위에 구르는 빗방울은 염주가 된다.
즉, 부용정을 신선과 부처가 사는 신비스런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다. 부용정을 가장 사랑한 이는 정조임금이었다.
개혁 의지가 강한 정조임금에게는 그를 반대하는 수많은 정치세력과 골치 아픈 문제들이 산더미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휴식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정조 임금은 틈날 때마다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 낚시를 하고 술잔을 돌리며 의리를 다졌다. 연못에 배 띄우고 시 짓기 놀이를 하면서 정해진 시간 안에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을 연못 가운데 섬에 잠시 귀양 보내는 벌칙을 주기도 했다.

영화당

부용정을 내려다보며 당당히 서있는 영화당. 후원의 다른 장소가 정적이고 내밀한 곡선의 세계라면 이곳은 동적이고 분주한 직선의 세계였다.  영화당의 방과 기둥, 그리고 들보에는 인조와 선조, 효종, 현종, 숙종 임금의 글씨가 남아 있다. 또 현판은 영조 임금이 지어 올렸으니 한 건물에 여섯 임금의 어필이 남아 있는 것이다. 과연 영화당은 후원의 인정전이라 불릴 만하다.
지금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가르는 담에 의해 막혔지만 영화당은 널찍한 춘당대와 한 영역으로 이어져 있었다.
춘당대에서 왕과 신하들은 함께 활쏘기와 연회를 즐겼고 각 지방 예비시험인 초시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임금을 모시고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장소가 되었다. 고대 소설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도 이곳에서 과거를 치른다. 조선의 젊은 인재들에게는 반드시 거쳐야 할 장소였나 보다.  명종 임금 당시 영화당에서 있었던 활쏘기 행사가 그림 속에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동쪽 처마엔 커다란 베로 짠 차일이 걸려 춘당대 쪽으로 펼쳐진다. 큰 대나무 가지로 기둥을 삼아 세우니, 나무들이 모두 그 아래로 들어갈 정도로 높았다.
영화당 앞에 임금의 자리가 있고 문무백관은 모두 섬돌에 설치한 널마루에 빼곡히 앉아 있다.
임금은 이날 문신에게 직접 제목을 내려 시를 짓게 하고 무신들은 짝을 지어 활을 쏘게 했다. 좋은 성적을 거둔 사람에게는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 등을 하사했고. 기녀들이 춤을 추는 뒤에는 악공 열 명이 나란히 앉아 거문고, 대금, 피리, 비파, 장고 등을 연주한다. 영조 임금도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종친들을 불러 활쏘기를 하고 은퇴한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해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애련정

그리 크지 않은 고요한 연못은 ‘연꽃을 사랑한다’는 뜻의 애련지다. 반은 연못에 걸친 채 서 있는 작은 정자의 이름도 애련정이다. 애련정은 원래 연못 가운데 섬처럼 지어졌으나 후에 연못 가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이들 모두 1692년인 숙종 18년에 지어졌는데 ‘애련’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에 대해 숙종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 연꽃을 사랑함은 붉은 옷을 입고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세속을 벗어나
맑고 깨끗하여 더러움을 벗어난 것이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애련정 기둥에 걸린 여덟 폭의 주련 역시 연잎에 구르는 빗방울을 진주로, 붉은 연꽃을 곱게 화장한 여자의 뺨으로 비유하며. 하나같이 연꽃을 찬양하고 있다.  숙종 임금은 심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비 인현왕후를 내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봉했다.  그러나 그 후 장씨와의 관계가 멀어져서 다른 여인과 애련지를 산책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바로 훗날 21대 영조 임금의 어머니가 된 숙빈 최씨다.  이 당시 숙빈 최씨는 궁중에서 가장 천한 일을 하는 나인이었다. 그러나 더러운 곳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맑은 연꽃처럼, 덕스럽고 단아한 최씨의 모습에 숙종 임금이 반한 것은 아닐까 감히 상상해 본다.

폄우사

이곳은 폄우사다. 폄우사는 효명세자가 사색하고 독서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효명세자는 숙종대왕이 탄생한 이후로 150년여 만에 왕후의 몸에서 태어난 적통 왕자였으니 아버지 순조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자라면서 점차 왕자다운 용모에 학습 능력이 뛰어나 빼어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어찌나 믿음직스러웠던지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국사를 맡기기로 한다. 19세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한 것이다. 임금으로서의 자질이 남다른 세자에게 일찌감치 정치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국정을 맡은 효명세자는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펼쳐 당시 문제가 되었던 세도정치를 무력화시키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리청정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효명세자는 시를 짓는 재능도 탁월하여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특히 자신을 사랑하고 믿어주신 아버지 순조를 향한 효심과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시가 많다. <춘당대>라는 시에는 순조의 덕을 기리는 내용이 들어 있다.
봄 못이 밝으니
꽃 그림자 곱기도 해라
온 산천 붉어
비와 이슬을 머금으니
우리 임금 깊은 덕이
온 세상에 미쳐 이같이 고르구나.
효명세자는 어머니 순원왕후의 마흔 번째 탄신일을 경축하기 위해 춘앵무라는 궁중무용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춘앵무는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색 옷을 입고 화문석 위에서 추는 독무다. 이 춤은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소중한 궁중문화예술로 전승되고 있다.
훗날 세자가 돌연 사망하자 세자에게 효명이란 시호를 내린 것도 이렇듯 세자의 효심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존덕정

이곳은 존덕정이다. 후원에 있는 정자들이 각각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특히 존덕정은 육각 지붕을 두 겹으로 올리고 그 지붕을 세우는 기둥을 각기 별도로 세운 모습이 특이해 보인다. 특히 바깥지붕을 받치는 지붕은 하나의 기둥을 세울 자리에 가는 기둥 세 개를 무리지어 세워놓아 날렵한 맵시를 뽐내고 있다.
<동궐도>에는 존덕정 옆에 네모반듯한 연못이 있고, 그 상류에 반달 모양의 연못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지금의 연못 모양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지만 아름다운 풍광만은 변함이 없다. 연못 반도지와 그 주변의 여러 정자들, 개울을 건너는 돌다리 등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정조 임금은 해마다 아끼는 신하들과 이곳을 찾아 꽃구경하고 낚시를 즐겼다.  정조는 세손 시절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도하고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반대파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력에 복수를 감행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학문이 뛰어난 인물을 과감히 발탁하여 이상적인 유교국가를 꿈꾸었다.
이 정자에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정조의 확고한 의지를 담은 글, <만천명월주인옹자서>가 새겨진 나무판이 걸려 있다. 만천명월주인옹란 만 개의 개울을 비추는 둥근 달이란 뜻으로 정조 임금 자신을 뜻한다.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친다. ......달은 태극인데, 그 태극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달은 태극인데, 그 태극은 바로 나.. 이 구절은 세상의 중심은 정조 자신이라는 의미다. 여기엔 모든 백성을 골고루 사랑하는 자애로운 군주이자 강력한 힘을 가진 왕으로서 의지와 자부심이 담겨 있다.

취한정

이곳은 취한정이다. 옥류천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정자이다.
예전에는 정자 주위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서 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취한정’이라는 정자 이름도 푸른 소나무들이 추위를 업신여긴다는 뜻이라고 하니 정말 시원했나 보다.

소요정

소요정의 ‘소요’는 ‘마음 내키는 대로 슬슬 걷는다’는 뜻이다.
후원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둔 보물 같은 정자의 이름이 소요정이라면 조선 임금의 마음 깊숙한 곳엔 어느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고 천천히 거닐고 싶은 열망이 있었을 것이다.
정조임금은 이곳에 자주 들러 휴식을 취했는데, 자연에서의 휴식과 사색을 통해 위정자로서의 마음을 쇄신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소요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요정에서 노니는 것은 그저 경치를 보며 쉬고자 함이 아니라 공손하고 신중하게 나랏일을 돌보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후세 사람들이여, 앞으로 소요정이 낡아 수리를 한다 해도 이런 뜻을 알고, 원래의 모습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정조임금은 소요정에서 신하들에게 유상곡수연을 베풀어 풍류를 즐긴 것으로 유명하다.
유상곡수연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으로 오기 전에 시를 짓는 풍류놀이로, 진나라 명필 왕희지가 벗들과 함께 즐겼다는 데서 시작되었다.
정조 임금은 이를 본떠 규장각 전 현직 관원과 자제, 승지나 사관을 지낸 이들 마흔 한 명을 특별히 불러 옥류천 소요암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었다. 이 중 1793년 3월 모임에서 화답한 친필 시문 42수가 전해진다.
당시 사용하던 붉은 색, 푸른색의 다양한 색지는 금가루와 운모가루로 장식돼 있다.
왕실에서 사용하던 최상급 향기로운 종이 위에 떠오른 시상을 적어 내려가던 이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청심정

이곳은 청심정이다. 꿩이 날개를 편 듯한 아름다운 처마 곡선을 가진 작고 단순한 정자다.  청심정은 후원의 정자 중에서도 수풀 속 깊은 곳에 묻혀 있어 그곳에 들어앉아 있으면 저절로 자연에 동화되는 경지를 맛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많은 임금님들이 달구경을 나와 시를 지었다.  숙종임금은 <사시제영>을 지어 청심정의 사계절을 노래하셨고. 정조임금도 한 수 지으셨는데 그 제목이 <청심제월>이다.
‘청심정에서 비갠 날의 밝은 달’이라는 뜻인데, 비 개인 청명한 밤, 밝게 떠오른 달을 보며 세상을 고루 비추는 달처럼 공명정대한 정치를 하리라는 다짐을 담았다.
이 마음과 밤기운은 누가 더 맑은가
때마침 동쪽 숲에서 비 갠 날 떠오르는 밝은 달을 만났구나.
안방에 처해서 그윽함에 가림은 그림과 같은 것
한 하늘 아래는 결단코 똑같이 밝아야 하는 거라오.
천하를 호령하던 이 나라의 임금님들도 은은한 달빛에 흠뻑 취하면 이렇듯 아름다운 시가 절로 나오나 본다.
청심정 앞에는 거북 조각상이 있는 연못이 있다. 그 거북의 등에는 ‘어필 빙옥지’라고 새겨져 있다.
어필은 임금의 글씨라는 뜻이며 빙옥지는 티 없이 맑은 연못을 뜻한다. 맑은 마음이라는 뜻의 청심정과 잘 어울리는 연못이다.
예전에는 빙옥지 아래 골짜기에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를 두어 청심정에 오르는 통로로 삼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찾아볼 수 없으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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