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보물 제71호~1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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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제71호~100호

 

대한민국 보물 제71호~100호

보물 제71호     함안 대산리 석조삼존상 (咸安 大山里 石造三尊像)

경남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 1139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사(大寺)골로 불리는 마을앞에 3구의 불상이 남아 있어서 하나의 석불군을 이루고 있다.
좌우 측면의 불상은 다른 불상의 협시보살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2구의 보살입상은 손모양만 다를 뿐 조각수법이 거의 비슷하다. 머리에는 두건 같은 높은 관을 쓰고 있으며 길쭉한 얼굴에 눈·코· 입이 평판적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나라 고유의 한복같은 옷을 입고 있는데, 두껍고 무거운 느낌이다. 어깨의 매듭과 양 무릎에서 시작된 타원형의 옷주름은 불상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런 표현들은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에서 보여지는 석조보살상들의 특징이다. 대좌(臺座)는 상대·하대로 나누어지는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연꽃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 8각의 단에는 각 면마다 귀꽃을 표현해 놓아 통일신라 초기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두 보살입상 사이의 중간에 놓인 머리가 없는 좌불상은 온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불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보물 제72호     산청 단속사지 동 삼층석탑 (山淸 斷俗寺址 東 三層石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단속사지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삼층석탑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72호로 지정되었다. 단속사 터의 금당터 앞에는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는데 그 중 동쪽에 세워진 것이 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층은 ‘ㄴ’자 모양의 돌을 이용해 바닥돌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그 위로 기단을 한 층 더 올린 후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쌓은 탑신을 올려놓았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비례가 알맞고 위로 오를수록 탑신의 크기가 알맞게 구성되어 있어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함께 세워져 있는 서탑과 비교할 때 그 규모와 수법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조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물 제73호     산청 단속사지 서 삼층석탑 (山淸 斷俗寺址 西 三層石塔) 

단속사 터의 금당터 앞에는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는데 그 중 서쪽에 세워진 것이 이 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동탑에 비하여 많이 부서지고 안에 봉안된 사리함이 도난당하는 등 많은 수난을 겪었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랫단은 가운데에 2개씩을 두고 윗단은 1개씩 두었다. 탑신의 지붕돌은 처마를 직선으로 처리하였으며, 밋밋한 경사가 흐르는 윗면은 네 귀퉁이에서 하늘을 향해 살짝 들어 올렸다.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점이나, 탑의 윗부분으로 갈수록 크기가 알맞게 줄어드는 수법에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랫기단의 너비가 넓어지고 4면에 새긴 가운데기둥의 수가 아랫기단은 2개, 윗기단은 1개로 줄어든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수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보물 제74호     양산 통도사 국장생 석표 (梁山 通度寺 國長生 石標) 

경남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 718-44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돠었다. 통도사를 중심으로 사방 12곳에 세워놓은 장생표의 하나로 절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이며, 절의 동남쪽 약 4㎞지점에 서 있다. 국장생이라는 명칭은 나라의 명에 의해 건립된 장생이라는 의미로, 거친 자연석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장생은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 등의 구실을 하고 있어 풍수지리설과 함께 민속신앙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장생은 경계표와 보호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선종 2년(1085)에 제작된 것으로, 나라의 통첩을 받아 세웠다는 내용이 이두문이 섞인 금석문으로 새겨져 있어 국가와 사찰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보물 제75호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昌寧 松峴洞 磨崖如來坐像)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105-4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1월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큰 바위에 앞면을 돌출되게 조각한 마애불(磨崖佛)로 바위 자체를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로 이용하고 있다.
민머리 위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육계)이 있으며, 둥근 얼굴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게 떡 벌어져 있고, 팔과 가슴은 넓지만 볼륨이 약화되어 차분한 느낌을 준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면서 입은 옷은 얇게 신체에 밀착되었는데, 형식적으로 처리된 계단식의 옷주름 때문에 사실성이 떨어진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대체로 이 석불은 얼굴이나 얇게 밀착된 옷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열의 양식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보이지만, 석굴암 불상보다는 사실성이 줄어들고 힘이 빠져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양식을 보여준다.

보물 제76호     춘천 근화동 당간지주 (春川 槿花洞 幢竿支柱)

강원 춘천시 근화동 793-1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1월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이 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의 양 쪽에 서서 이를 버티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춘천시내에서 의암호를 따라 춘천역으로 돌아가는 도로 옆에 세워져 있는 이 당간지주는 아무런 꾸밈새가 없는 간결한 형태이다. 마주 보고 있는 두 기둥 사이에는 2단으로 이루어진 당간의 받침돌이 놓여져 있는데, 아랫단은 둥근조각이 있고, 윗단은 16잎의 연꽃조각이 돌려져 있다. 기둥의 꼭대기는 반원형을 이루고 있고, 한 곳에만 깃대를 고정시켰던 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돌을 다듬은 기법이나 연꽃잎을 새긴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77호     춘천 칠층석탑 (春川 七層石塔) 

강원 춘천시 소양로2가 162-2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춘천 시가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조선 인조 때 이곳의 현감이었던 유정립이 인조반정으로 파직당하고 낙향하여 이 탑 부근에 집을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충원사(忠圓寺)’라는 글이 새겨진 그릇을 발견하여, 충원사 내에 속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한국전쟁 때 심한 손상을 입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기단의 일부가 지하에 파묻혀 있었는데, 지난 2000년에 시행된 전면적인 보수공사로 기단부의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 석탑은 아랫부분을 발굴 조사한 결과 2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이 놓여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윗층 기단도 탑몸돌에 비하여 제법 넓어 안정감이 있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널판돌을 놓아 1층 탑몸돌을 괴고 있다. 7층에 이르는 탑신(塔身)은 위로 올라가면서 그 크기가 적당히 줄고 있는데, 기단이 넓은 것에 비해 몸돌이 작아 주목되지만 7층이나 되는 높이가 비례의 불균형을 보충하여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까지가 6단이고 4층 이상은 5단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경쾌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 중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진 상태여서 아쉬움을 주고 있고,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거의 파손된 상태이다.

보물 제78호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原州 居頓寺址 圓空國師塔碑) 

강원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44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거돈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의 스님인 원공국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공국사(930∼1018)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세속에서 쓰던 성은 이씨인데,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이 작고 머릿돌이 큰 것이 특징적이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모양이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운 것으로,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새긴 글씨는 해서체인데, 중국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중국에 비교해서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편 이 비에는 머릿돌을 옮기려 할 때 수십 명의 장정들이 매달려도 끄떡않던 돌을 농가에서 빌려온 소 한 마리가 옮겼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보물 제79호     홍천 희망리 삼층석탑 (洪川 希望里 三層石塔) 

강원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 151-7번지 읍사무소에 있으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갖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3층석탑으로, 원래는 홍천초등학교 뒤에 있던 것을 현재의 군청으로 옮겨 놓았다. 보수를 하여 보존상태는 양호하나 이미 지붕돌은 깨어졌다.
널찍한 돌 2장이 놓여 있고 그 위로 기단과 탑신부가 있는 상태이다. 기단 가운뎃돌의 각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가운데에도 기둥조각을 두었다. 기단을 마감하는 맨 윗돌은 윗면에 약간의 경사가 있다.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3층의 몸돌이 없어져 위층으로 가면서 줄어드는 비율을 뚜렷하게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붕돌 밑에는 모두 4단씩의 받침을 새겼다. 지붕돌이 두껍지는 않지만, 네 귀퉁이 끝부분의 치켜올림이 적어서 날렵한 느낌은 없다.
각 부의 조각이 약화된 모습을 보여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80호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 (洪川 希望里 幢竿支柱)

강원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 376-26번지에 위치하고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부른다. 사찰 입구에 설치되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하기도 한다.
이 곳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주변 부지에서 많은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절터로 짐작되고 있다.
지주는 약 70㎝의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는데, 이 두 지주의 사이가 당간이 들어갈 부분이다. 특별한 장식없이 소박하며, 중간 아래로 내려오면서 조금 굵어졌고, 밑부분에 이르러는 더욱 굵어진 모습이다. 깃대를 고정시켜주는 홈이 안쪽 윗부분에 파여져 있다.
인근에 함께 있는 홍천 희망리 삼층석탑(보물 제79호)과 관련지어 볼 때, 거의 같은 시기인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보물 제81호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江陵 寒松寺址 石造菩薩坐像) 

강릉시립박물관에 있으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강릉에 있던 한송사가 폐사된 후 명주군 구정면 어단리에 있던 것을 보물로 지정하면서 현재는 강릉시 오죽헌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머리와 오른팔이 없어진 불완전한 보살상이지만, 입체감이 풍부하고 매우 활달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희귀한 작품이다. 왼팔은 안으로 꺾어 왼다리에 얹었으며, 오른팔도 역시 그렇게 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없어져서 알 수 없다. 앉은 자세는 왼다리가 안으로 들어가고, 오른다리를 밖으로 내어 발을 그냥 바닥에 놓고 있다. 이런 자세는 보살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아마 어느 본존불을 모시던 협시보살이었을것으로 여겨진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친 천의(天衣)는 아주 가벼운 느낌을 주며, 목걸이도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어 아름답다.
이 보살상은 특이한 자세와 더불어 사실적이며 활달한 조각수법으로 특이할 만하다.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 중인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과 조각수법이 흡사한 고려시대의 우수한 작품이다.

보물 제82호     강릉 대창리 당간지주 (江陵 大昌里 幢竿支柱) 

강원 강릉시 옥천동 334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강릉 시내에 남아 있으며 주변에서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어 이 주변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을 뿐 구체적으로 전하는 기록은 없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지금의 자리가 원래의 위치이며, 현재 1m 간격을 두고 두 지주가 남북으로 마주 서 있다. 지주 사이의 깃대를 받치던 받침이나 기단부(基壇部)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원래의 모습을 파악할 수는 없다. 바닥부분에 직사각형의 돌을 놓은 것으로 보아 기단부도 직사각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꼭대기 부분은 안에서 바깥쪽으로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안쪽 윗부분 중앙에는 깃대를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진 구멍이 하나 있다.
이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조각한 흔적이 없는 소박하고 간결한 모습이다.

보물 제83호     강릉 수문리 당간지주 (江陵 水門里 幢竿支柱)

강원 강릉시 옥천동 43-9번지에 있고 10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일대가 절터로 추정되나 지금은 주거지로 변했기 때문에 절터의 존재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당(幢)이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달아두는 깃발을 말하며 이를 달던 깃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는데, 당간지주는 당간을 양 옆에서 고정시켜주는 장치를 이르는 말이다.
원래의 위치에 있던 그대로이며, 두 지주가 1m 간격을 두고 동 ·서로 마주 서 있다. 깃대를 고정시켰던 흔적은 안쪽 윗부분에만 있는 직사각형의 구멍으로 알 수 있다. 두 지주의 최상단은 안쪽 꼭대기부터 바깥쪽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내려온다.
동쪽 지주의 남쪽 면에 조선 중종 3년(1508)과 순조 17년(1817)에 복원되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다. 각 면이 거칠고 폭도 고르지 않으며 조각이 없어, 당간지주로서 발달되지 않은 형식이지만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충실하다.

보물 제84호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 (江陵 神福寺址 石造菩薩坐像)

강원 강릉시 내곡동 403-2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신복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년)에 범일국사가 처음 세웠다.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제87호)을 향하여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보살상을 표현하였는데, 왼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를 꿇어 앉은 자세를 하고 있으며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원통형의 높다란 관(冠)을 쓰고 있는 얼굴은 풍만한데다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어 복스럽게 보인다. 관 밑으로 드러난 머리카락은 어깨너머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걸쳐 내져진 옷자락은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보살상의 사실성을 더해준다. 팔찌, 목걸이, 옷주름은 굵은 띠처럼 묘사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둥글고 둔중한 조각수법을 보인다. 이러한 자세나 조각 솜씨는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국보 제48호)앞의 공양보살상과 유사한 것으로 같은 지방 계열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보살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윗면을 둥글게 하여 보살이 들어앉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바깥쪽에는 큼직큼직하게 2겹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규칙적인 간격의 옷주름과 단순해진 장신구, 대좌의 조각수법 등에서 화려한 신라적 요소가 사라지고 고려 초기의 둔화된 표현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보물 제85호     강릉 굴산사지 승탑 (江陵 崛山寺址 僧塔)

강원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731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승탑은 고려시대에 굴산사를 세운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추정된다. 굴산사터의 위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모든 부재가 8각을 기본으로 하여 조성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변화된 수법을 보인다.
사리를 모시는 몸돌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받침부분이 놓이고, 위로는 지붕돌과 꼭대기장식이 놓였다. 꼭대기장식으로는 상륜받침과 보개(寶蓋), 연꽃봉오리 모양의 구슬장식이 놓여 있다. 한 돌로 된 바닥돌은 8각의 평면이며, 위에는 접시 모양의 받침돌이 있다. 2단으로 된 8각의 괴임돌이 있는 아래받침돌은, 평면이 원형이며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 중간받침돌에는 8개의 기둥을 세워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천상(天上)의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조각되어 있는 상은 8구 모두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악기는 장구(또는 장고)·훈(塤)·동발(銅발)·비파(琵琶)·소(簫:피리)·생황(笙簧)·공후(하프)·적(笛:대금) 순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맨 윗받침돌은 위를 향해 활짝 핀 연꽃모양을 새겼다. 몸체는 8각의 낮은 몸돌과 지붕의 경사가 급한 지붕돌로 이루어지는데, 지붕돌 처마끝의 치켜올림이 없어 밋밋하다. 

보물 제86호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 (江陵 崛山寺址 幢竿支柱) 

강원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1181번지에 있으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신라 문성왕(文聖王)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굴산사의 옛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당간지주이다.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당나라 유학시 왼쪽 귀가 떨어진 승려가 고향에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는 청으로 지은 사찰이라고 한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사찰 앞에 세워지며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두 지주의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밑면에는 돌을 다룰 때 생긴 거친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깃대를 고정시켰던 구멍은 상·하 두 군데에 있고, 정상은 끝이 뾰족한 형상이며, 남쪽 지주의 끝부분은 약간 파손되었다. 전반적으로 소박하나 규모가 거대하여 웅장한 조형미를 보인다.

보물 제87호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江陵 神福寺址 三層石塔) 

강원 강릉시 내곡동 403-2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신복사의 옛 터에 남아있는 탑이다. 신복사는 통일신라 때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즉 신라의 한 처녀가 우물에 비친 햇빛을 보고 그 물을 마셨는데 곧 아이를 배어 낳게 되었다. 집안 사람들이 아이를 내다버렸으나, 아이의 주위로 빛이 맴돌아 괴이하게 여겨 다시 데려와 길렀는데, 그 이름을 범(梵)이라 하였다. 범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고향에 돌아와 신복사와 굴산사(掘山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기록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탑은 2층의 기단(基壇)을 쌓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것으로, 각 부분의 모습들이 특이하다. 바닥돌의 윗면에는 연꽃이 엎드려 있는 듯한 모양의 조각을 하여 둘렀고,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을 3개씩 새겨 넣었다. 탑신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겨 얹어 놓았다. 탑신에는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셔두는데, 1층의 몸돌에 이를 안치하는 방인 감실(龕室)모양의 조각이 있다. 1층의 몸돌에 비해 2·3층은 갑자기 그 크기가 줄어들어 매우 얇다. 지붕돌 역시 얇아서 귀퉁이끝은 치켜올림이 희미하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3단이다.
꼭대기에는 드물게 머리장식이 온전히 남아있는데, 각 부분의 높이에 비해 폭이 넓어 안정감을 준다.
탑의 앞쪽에는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받치듯이 들고 있는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제84호)이 있다. 이러한 모습은 같은 강원도 내의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국보 제48호)과 비슷하여 이 지방의 특색이 아닐까 짐작된다. 탑의 기단과 몸돌의 각 층 밑에는 널돌로 괴임을 넣었는데,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에 자주 보이는 모습 중 하나이다. 또한 아래층 기단에 안상이 새겨진 것이나,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3단으로 되어있는 점도 고려 전기의 석탑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보물 제88호     탑산사명 동종 (塔山寺銘 銅鍾)

전라남도 해남군에 위치하며 1963년 1월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고려 시대 만들어진 높이 79㎝, 입지름 43㎝의 종으로 신라 형식을 계승한 전통적인 모습에 고려후기에 새로 나타난 특징들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종 꼭대기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고, 매다는 곳인 용뉴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부분에는 연꽃으로 띠를 둘렀고, 그 아래는 덩굴무늬를 새겼다. 사각형의 연곽(蓮廓) 안에는 가운데가 돌출된 연꽃을 9개 두었는데, 신라 때의 연꽃봉우리보다 훨씬 납작해져 도안화된 모습이다.
종의 몸체에는 삼존상을 장식하였고, 그 아래쪽에 새겨진 종의 제작시기는 고려 명종 3년(1173)이나 고려 고종 20년(1223)으로 추정된다.
전체 형태는 상원사 동종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선을 갖고 있으며, 용뉴와 문양의 세부가 뛰어난 고려시대 범종 중에서도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걸작이다.

보물 제89호     영암 도갑사 석조여래좌상 (靈巖 道岬寺 石造如來坐像) 

전남 영암군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의 미륵전에 모셔져 있는 석조불상이다. 이 불상은 몸체와 광배(光背)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어서 마치 바위에 직접 불상을 새긴 마애불과 같은 기법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를 큼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타원형이며 도드라진 눈덩이,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은 강건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넓은 어깨, 평평한 가슴, 단순한 몸의 굴곡 등은 생동감이 없는 경직된 모습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쳐 입고 있으며 몇가닥의 옷주름이 투박하게 표현되었다.
갸름한 타원형 광배의 가운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꼭지와 머리 양 옆에 각각 작은 부처가 표현되었다. 광배에 새겨진 조각은 대체적으로 생략이 강하다.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 놓은 대좌(臺座)는 밋밋한 4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본래는 연꽃무늬를 새긴 8각형의 대좌였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다소 경직되고 형식화된 수법을 보여주지만 얼굴표정에서 훈훈한 정감을 느끼게 하는 불상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투박하고 생략이 강한 고려적 요소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보물 제90호     대반열반경소 권9~10 (大般涅槃經疏 券九~十) 

전남 순천시에 있으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의 열반을 다루고 있는 경전으로, 중생들에게 열반을 종교적·철학적으로 깊이 이해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책은 담무참(曇無嘴)이 번역한 대반열반경에 당나라 법보(法寶)가 주석을 붙인 것으로, 권9와 10이 한 책으로 되어있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이며 크기는 세로 35.5㎝, 가로 32.7㎝이다.
세조 때 간경도감<刊經都監:세조 7년(1461)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교장(敎藏)을 보고 다시 새긴 것인데, 교장(敎藏)은 고려 숙종 4년(1099)에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 요, 일본 등에서 구해 온 불경을 흥왕사에서 간행한 것을 가리킨다.
이 책이 교장(敎藏)이 아니고 교장(敎藏)을 보고 다시 새겼다는 사실은 체재가 두루마리 형식을 따르나 책으로 되어 있다는 점과 종이의 질이 조선 초기의 것이란 점이다. 또한 같은 절에 보관되어 온『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 제207호) 끝에 교장(敎藏)을 원본으로 다시 새겼다는 간행기록이 남아있어 그 확증을 굳혀 준다. 원본 맨 뒤에 있는 기록을 보면 장모(蔣모)가 목판의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으며, 글씨는 당시 유행한 구양순의 서풍을 보여 주고 있다.
국가에서 운영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만큼 원판 못지않게 정성들여 불경을 새겼으며, 불교경전으로서 뿐 아니라 우리나라 판본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보물 제91호     여주 창리 삼층석탑 (驪州 倉里 三層石塔) 

경기도 여주시 상동 132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래 창리지역 과수원 안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현재의 터로 옮긴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형태이나 그 느낌이 독특하다.
아래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이 2개씩 새겨져 있는데, 움푹한 무늬의 바닥선이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당시의 조각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기단을 마감하는 맨윗돌에는 엎드린 연꽃 모양의 조각을 둘러 놓았는데, 보기 드문 모습이다. 탑신은 독특한 수법으로 돌을 올려놓고 있다. 즉 1층의 몸돌만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고, 이후 지붕돌부터는 윗층의 몸돌과 하나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모자 형태의 돌 3개를 얹어놓은 듯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며, 추녀는 매우 두껍고 귀퉁이 끝의 들림도 희미하다.
각 부분의 재료가 두툼하여 전체적으로 높아 보이며, 아래기단의 안상이나 3단의 지붕돌 밑면받침 등에서 고려시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조각수법도 엉성하고 몸돌과 지붕돌을 각 하나의 돌로 쌓는 등 간략한 모습들도 여기저기 보이고 있어 고려 중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보물 제92호     여주 하리 삼층석탑 (驪州 下里 三層石塔) 

경기도 여주시 상동 132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하리지역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창리의 3층석탑과 함께 현재의 터로 옮긴 것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은 4면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그 윗돌 중앙에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2단의 테두리 조각을 둘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의 각 면 모서리마다 얕은 기둥 형태의 조각이 나타나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으로,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귀에서 위로 약하게 솟아있다. 전체적으로 돌을 짜서 올리는 수법의 규칙성을 보이고 온화한 비율감이 느껴져 고려 전기보다는 중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탑을 옮겨 세울 당시, 1층 몸돌에서 독특한 모습의 사리홈이 발견되어 흥미를 끌고 있다. 즉, 몸돌 윗면의 중앙에 높이 3㎝의 얇은 띠가 둘러져 있고 그 안으로 2개의 구멍이 파여있는데, 이와 닿게 되는 지붕돌의 밑면에도 이를 배려한 듯 홈이 깊게 파여져 있다. 이는 몸돌의 윗면에만 깊은 홈을 두어 사리를 담아두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 정반대의 형태를 하고 있어 특이하다.

보물 제93호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 9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보물 제94호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 (堤川 獅子頻迅寺址 四獅子 九層石塔)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1002-1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빈신사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상·하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4층의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기단은 글이 새겨져 있어 탑의 조성 경위를 알 수 있으며 위기단은 사자 4마리를 배치하여 탑신을 받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네 모서리에 한마리씩 배치한 사자의 안쪽 공간에 불상을 모셔 두었다. 앉은 모습의 불상은 특이하게도 두건을 쓰고 있으며 표정이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으로 이 밖에도 몇 기의 탑이 더 전해지고 있다. 현재 탑신에는 지붕돌이 4층까지 남아 있는데, 아래기단에 있는 글을 통해 원래는 9층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고려 현종 13년(1022)에 만들어진 이 탑은 연대가 확실하여 각 부의 구조와 양식, 조각수법 등 다른 석탑의 조성연대를 추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탑이다.

보물 제95호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 (忠州 彌勒里 五層石塔)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6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곳에는 고려시대의 석불과 석굴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앞쪽에 석등과 더불어 이 석탑이 남아 있다.
기단 하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난 돌로 특별하게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그 위로 기단의 맨윗돌이 올려져있다. 탑신(塔身)은 1층 지붕돌이 2장일 뿐 몸돌이나 다른 지붕돌은 모두 1장의 돌로 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몸돌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기둥을 모서리에 새겼다. 지붕돌은 급격하게 좁아져 석탑 전체의 균형과 미관을 손상시키고 있다. 지붕 밑면의 받침은 5단이지만 추녀가 짧아서 6단인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수평이고 지붕돌의 경사는 매우 급한데 귀퉁이의 치켜올림은 거의 없는 편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는데, 노반은 6층 지붕돌로 보일 만큼 큼직하고, 복발은 반원 모양이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중심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긴 쇠꼬챙이모양의 찰간(擦竿)이 남아있다.
5단의 지붕돌 밑면받침과 직선의 처마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인데, 지붕돌의 급경사와 형식적인 기둥새김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보물 제96호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忠州 彌勒里 石造如來立像)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8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고려 초기 이 부근에서 많이 만들어진 일련의 커다란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하는 석조여래입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말 마의태자가 나라의 멸망을 비통하게 여기며 이곳까지 와서 불상을 만들고 개골산으로 들어갔으며, 그 여동생은 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보물 제406호)을 만들었다고 한다.
모두 5개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고 1개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긴 살구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은 고려 초기 커다란 불상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체는 단순한 옷주름의 표현이라든가 구슬같은 것을 잡고 있는 손의 묘사 등에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함을 느낄 수 있다.
이 불상의 대담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보아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보물 제97호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 (槐山 院豊里 磨崖二佛並坐像)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산124-2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가 12m나 되는 큰 암석을 우묵하게 파고,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한 마애불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예이다.
둥근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 얼굴 전반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완강하면서도 한결 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반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등 신체의 표현은 몸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형식화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무딘 선으로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으나, 세부수법은 닳아서 잘 알 수 없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예는 죽령마애불, 전(傳) 대전사지출토청동이불병좌상 등이 있는데, 이것은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多寶如來)석가여래(釋迦如來)의 설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98호     충주 철조여래좌상 (忠州 鐵造如來坐像) 

충북 충주시 사직산12길 55, 대원사 (지현동)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0.98m의 철로 만든 불상으로 단호사 철불좌상(보물 제512호)과 같은 양식이며 더욱 엄격미가 강조된 점이 특징이다.
머리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다. 삼각형에 가까운 얼굴, 길고 넓은 눈, 꽉 다문 입가로 내려오는 팔자형(八字形)의 주름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당당한 상체와 무릎을 넓게하고 앉은 자세 등 몸의 균형이 비교적 잘 잡혔지만, 팽팽하면서도 과장된 표현을 하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좌우대칭을 지키면서 기하학적 옷주름선을 규칙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엄격성을 강조하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 초기에 걸쳐 유행하던 철로 만들어진 불상 가운데 하나로 도식화된 표현으로 볼 때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99호     천안 천흥사지 당간지주 (天安 天興寺址 幢竿支柱)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천흥4길 115-5 (천흥리)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고려 태조 4년(921)에 창건되었던 천흥사의 당간지주로 현재 천안시 천흥리 마을의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절에서는 의식이 있을 때 절의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동·서로 서있는 두 지주는 60㎝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졌다. 기단은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였는데 기단 주위에 안상(眼象)을 새겨넣어 당간지주의 장식화된 측면을 보이고 있다. 동·서 지주 사이로 깃대를 직접 받치던 받침은 남아있지 않다. 안쪽면에 조각이 없으며 상단 꼭대기끝 한 곳에만 깃대를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구멍이 있다. 지주의 바깥 면은 위에서 아래까지 중앙에 1줄의 선을 새겼다.
지주 각 부의 양식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나 퇴화된 기법으로 만들어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특히 천흥사터에서 출토된 천흥사 동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원년(1010)으로 되어 있어 이 당간지주도 절을 창건하면서 같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100호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唐津 安國寺址 石造如來三尊立像) 

충청남도 당진시 원당골1길 188 (정미면)에 위치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안국사는 안국산(일명 은봉산)에 위치한 폐사지(廢寺地)로 1929년에 다시 세웠다고하나 또다시 폐사되었다. 이곳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 높이 5m에 가까운 큰 석불입상이 있다.
머리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신체의 비례상 어색하게 큰 편이다. 불상의 몸은 대형화되었는데 인체의 조형성이 감소되어 네모난 기둥같은 느낌을 준다. 또 몸과 어울리지 않게 팔과 손을 붙여 비현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있으며, 왼손은 배에 붙여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다. 좌우에는 본존불을 모시는 보살상이 있는데, 오른쪽 보살은 허리까지 묻혀 있고 왼쪽 보살은 머리만 파괴되었을 뿐 형식은 본존불과 같다.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괴체화한 불상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과 함께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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