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101호~2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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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보물 제101호~200호

 

보물 제101호     당진 안국사지 석탑 (唐津 安國寺址 石塔) 

안국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안국사는 창건된 해가 분명하지 않고, 다만 절 안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통해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던 것을,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주지가 되어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곧 다시 폐사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제100호)이 보존되어 있다.
탑은 아래부분인 기단부(基壇部)가 다른 탑들에 비해 간단하고, 2층 이상의 탑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포개져 있어 다소 엉성해 보인다. 탑신(塔身)은 유일하게 1층 몸돌만이 남아있는데, 각 귀퉁이에 기둥을 본떠 새기고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다른 3면에는 여래좌상(如來坐像)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고 무거워 보이며, 처마 밑으로 깊숙히 들어가 4단의 지붕돌 밑면받침을 밖으로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감을 잃고 있고 조각도 형식적이며, 1층 몸돌이 작아서 마치 기단과 지붕돌 사이에 끼워져 있는 듯 하여 우수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려 중기 석탑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탑이다.

보물 제102호   서산 보원사지 석조 (瑞山 普願寺址 石槽) 

서산 보원사터에 위치한 석조이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던 곳이다.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원형·팔각형·장방형 등이 있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을 보인다.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친 다듬자국이 그냥 남아 있어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는지도 알수 없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보물 제103호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 (瑞山 普願寺址 幢竿支柱)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곳은 옛 절터로, 지금은 주변이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는데, 땅을 갈 때 가끔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지주는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보물 제104호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瑞山 普願寺址 五層石塔)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감이 있으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보물 제105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 (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은 사리탑 혹은 탑이라 하여 절의 한켠에 세워두며,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쌓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어둔다.
이 탑은 보원사(普願寺)터에 세워져있는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 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 8각의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윗받침돌은 윗면에 수직으로 새긴 난간조각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두었다. 그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을 두었으며,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서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으로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윗면은 가파른 경사를 표현하였다. 각 모서리 선은 뚜렷하며, 끝에는 꽃조각을 하였으나 거의 남아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위로, 굽이 달려있는 3개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이 탑은 법인이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보물 제106호)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8각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몸돌에서 보이는 여러 무늬와 지붕돌의 귀꽃조각 등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보물 제106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碑)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보물 제107호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扶餘 普光寺址 大普光禪寺碑) 

부여군 임천면에 있던 보광사(普光寺)의 중창을 기념하여 건립한 비석으로 중창을 주도한 원명국사(圓明國師) 충감(沖鑑 : 1275~1339)의 행적과 중창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원래는 충남 부여군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을 1963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문은 2차에 걸쳐 새겼는데, 앞면은 건립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새겼고 뒷면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추가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공민왕 원년(1351) 65세로 입적하였다. 죽으면서 문도들에게 비나 탑을 세우지 않도록 당부하여 6년이 지나서야 비가 세워졌다. 뒷면의 추가된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록을 적은 비도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지인 석능일이 고쳐 새긴다고 되어있다.
현재 비받침과 비머릿돌이 없고, 비몸만 남아있다. 비몸의 가장자리는 덩굴무늬를 띠 모양으로 둘러 새겼다. 석재는 편마암이고 윗쪽의 양끝을 사선으로 잘라냈다. ‘보광사중창비’라고도 하는 이 비는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석비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보물 제108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扶餘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보물 제109호   전 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 (傳 光州 聖居寺址 五層石塔) 

광주공원 안에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으로 이 부근은 성거사(聖居寺)터라고 전해진다. 이 광주공원은 원래 성거산(聖居山)이라 불렀는데, 산의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으므로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등위치에는 성거사를 세우고 거북의 목 부근에는 5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2단 기단 양식에서 기단을 1단만 두는 고려시대로의 양식변화를 보여준다. 또 지붕돌 추녀와 몸돌의 알맞은 비례감과, 위로 오르면서 줄어드는 비율이 크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게 보이면서도 안정감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1층 몸돌에서 나타난다. 즉 몸돌 전체를 아래위 2단으로 나누어 5개의 돌을 맞추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고려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특색이다. 또한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각 귀퉁이는 아래위 모두 약간씩 치켜올려진 상태이다.
1961년 해체하여 보수할 때 2층 몸돌에서 사리공(舍利孔)과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이 석탑의 연대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1층 몸돌과 3층 몸돌은 보수할 당시에 보충한 것이다.

보물 제110호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 (光州 芝山洞 五層石塔) 

광주시내에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2기의 탑 가운데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탑이 서있는 부근은 백주사(栢州寺)터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추정할 만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탑의 구성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형태로 신라석탑의 기본형을 잃지 않고 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는 여러 개의 돌을 짜맞추어 구성하였으며,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특히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1층은 5단인데 비해 2층부터는 4단으로 간략화되어, 양식상 만들어진 시대가 통일신라 후기로 내려옴을 알 수 있다.
1955년 해체, 수리할 때 4층 지붕돌 윗면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고 1961년에 다시 수리를 하여 일부 석재를 보완하였다. 광주 전남지방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5층석탑 가운데서도 우수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보물 제111호   담양 개선사지 석등 (潭陽 開仙寺址 石燈)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는데, 최근에 바닥을 파고 흩어진 부분을 정리하여 다시 세웠다.
높이 3.5m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 모양이 새겨졌고, 사잇기둥은 장고모양이며,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8각이며 창이 8면에 뚫렸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낮고 널찍한 괴임이 있고, 8각의 끝부분에는 꽃모양을 둥글게 조각하였다.
석등의 창 사이 공간에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글씨를 새긴 유일한 예로, 비슷한 시대의 다른 작품의 연대와 특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표준이 되는 작품이다.

보물 제112호   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 (光陽 中興山城 三層石塔) 

중흥산성 서쪽 시냇가에 있는 3층 석탑이다. 중흥산성에는 신라 경문왕 때 도선대사가 창건한 중흥사(中興寺)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왜병과의 격전끝에 승병들은 모두 죽고 절은 불에 타버렸다고 전한다.
이 탑은 원래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 제103호)과 함께 있었으나, 석등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고 석탑만이 남아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위층기단에는 모서리 기둥을 굵직하게 조각하였다. 한 면을 둘씩 나누어서 앞면에는 인왕상(仁王像)을, 양 측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뒷면에는 보살상(菩薩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각 층 몸돌에는 두꺼운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다. 1층 몸돌의 각 면에는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는 여래상(如來像)을 조각하였고, 2층 이상의 몸돌은 훨씬 작아지는 모습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처마 밑은 수평을 이루고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 남아 있고 그 위에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있다.
이 석탑은 특히 각 부분의 풍부한 조각들이 눈에 띄는데, 보존상태가 좋고 조각된 상들도 뚜렷하다. 탑신에 비해 밑의 기단부가 너무 커 보이는 경향이 있으나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보물 제113호   청도 봉기리 삼층석탑 (淸道 鳳岐里 三層石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이다.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8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위·아래층 기단 모두 각 면 가장자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안쪽에는 가운데기둥 2개씩을 새겼다. 그 위로 뚜껑처럼 덮어놓은 넓적한 윗돌도 8개의 돌로 구성되어 짜임새가 있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 몸돌의 높이가 지나치게 높은 반면 2층부터는 급격히 짧아져 보기 좋은 비례라고 볼 수 없다. 지붕돌은 넓고 얇은 편이며, 지붕돌 밑면받침은 5단이고 처마끝은 수평으로 되어 있어 경쾌하다. 이 석탑은 기단의 위·아래층에 모두 2개의 가운데기둥을 조각한 것으로 보아 초기석탑의 형식을 따른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의 작품이다.

보물 제114호   안동 평화동 삼층석탑 (安東 平和洞 三層石塔) 

경북 안동시 평화동에 있는 3층 석탑으로, 탑이 주변에 민가가 들어서 있어 절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절이름 또한 알 길이 없다.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는 기단(基壇)을 위·아래 2단으로 꾸민 3층 석탑의 모습으로, 주목할 점은 아래층 기단에 아름다운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윗층 기단은 윗면에서 상당한 경사를 보이고 각 모서리도 약간 위로 치켜 올려진 전혀 새로운 형식을 갖추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지붕돌로 보일 정도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지붕돌은 처마밑이 직선이며,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들이 남아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다.
이 탑은 지붕돌이 넓어 매우 안정된 모습을 보이며, 전반적으로 그 비례감이 아름답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로 보인다

보물 제115호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安東 泥川洞 磨崖如來立像) 

자연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전체 높이 12.38m의 거구의 불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호)도 이와 거의 같은 수법을 보여준다.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어 거구의 불상임에도 전체적인 형태는 자연스럽다. 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음이 분명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몇 개 안되는 옷주름은 매우 도식적(圖式的)으로 표현되고 있다. 양 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거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상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물 제116호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 (榮州 石橋里 石造如來立像) 

이 불상은 발견 당시 목에는 금이 가고 발목 아래는 땅에 묻혀 불완전한 상태였으나 현재는 보수정비를 통해 양감이 강조된 발과 유려하게 흘러내린 옷자락 등 생동감 있는 세부묘사를 확인할 수 있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세련된 이목구비를 갖춘 얼굴은 둥글고 우아한 모습이다. 신체는 몸에 꼭 붙은 오른팔이나 쳐진 어깨 등에서 다소 부자연스럽지만,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양감있는 다리에서 생동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옷깃은 굵은 선으로 둥글게 표현하였다. 특히 양 다리에서는 각각 동심타원형의 주름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표현기법이다.
동심타원형의 주름이 삼국시대 작품인 장창곡불보다는 형식적이면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함안 대산리 석조삼존상(보물 제71호)보다는 덜 형식적인 점을 볼 때, 만들어진 시대는 통일신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다소 이완되고 형식화되어 가는 면도 보이지만 아직까지는 긴장감 넘치고 우아하며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라 하겠다.

보물 제117호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 (尙州 化達里 三層石塔) 

사벌국(沙伐國)의 왕릉이라고 전해지는 곳의 서쪽에 있는 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며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탑신(塔身)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는데, 1층 몸돌은 유난히 넓고 커서 기단보다도 높다. 각 층의 몸돌을 덮는 지붕돌은 처마가 반듯하며 네 귀퉁이의 위로 들린 정도가 강하여 탑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탑의 머리장식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전반적으로 비례가 불균형하고 기단부의 일부가 훼손되어 기이한 형태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기단 위에는 머리가 없는 1구의 석조여래좌상이 1층 몸돌에 기대어 앉아 있는데, 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나 이곳이 옛 절터임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보물 제118호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 (尙州 曾村里 石造如來立像) 

경상북도 상주의 용화사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광배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조각된 높이 1.98m의 석불입상으로 마멸이 심해서 세부수법을 자세히 살펴 볼 수는 없다.
불상의 머리는 확실히 구별할 수 없지만 민머리처럼 보이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길고 풍만한 모습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지만 단정한 인상이다. 체구는 단정하며, 양 어깨에 걸쳐 있는 옷자락은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 역시 많이 마모되어 가장자리에 새겨진 불꽃무늬만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단정한 체구에 다소 경직되고 현실적인 면이 강해진 특징을 가진 불상으로, 통일신라 후기 석불입상의 경향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보물 제119호   상주 복용동 석조여래좌상 (尙州 伏龍洞 石造如來坐像) 

석불이 위치한 곳은 상주의 명산으로 알려진 왕산의 동쪽 중간쯤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이 위치해 있던 곳은 상주시 복룡동 358번지였으나, 1975년 10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콧날이 약간 손상된 얼굴은 둥글고 풍만한데, 가늘게 뜬 눈, 작고 도톰한 입술 등에서 인간적이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어깨는 현저히 좁아졌고, 오른손은 없어졌지만 두 손이 아래위로 겹쳐진 모습으로 보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모양으로 생각된다. 몸 전체를 두껍게 감싼 옷은 양 어깨에서 부채꼴 모양을 이루며 좌우로 대칭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의 표현은 부드러우면서도 형식적으로 처리된 모습이다.
이 불상은 전반적으로 부드러우면서 풍만한 모습이지만, 형식화된 옷주름의 표현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보물 제120호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좌상 (尙州 曾村里 石造如來坐像) 

경상북도 상주군 용화사에 모셔져 있는 높이 1.68m의 석조불상이다.
거의 직사각형의 얼굴 형태를 하고 있으며, 어깨와 팔, 다리 등 신체 각 부분이 직선적이고 각이 진 모습이어서 전체적인 인상이 강인하며 경직된 느낌을 준다. 목에는 3줄의 삼도(三道)가 있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신체에 밀착하여 얇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 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불을 형상화한 것이 분명하다. 광배(光背)는 남아 있지 않으며, 대좌는 8세기에 많이 나타나는 8각의 연꽃무늬 대좌로 안정감이 느껴진다.
수평으로 길게 뜬 눈, 미소없는 작은 입, 군살 붙은 턱 등의 세부표현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임을 알려준다. 통일신라 중기의 풍만하고 균형있는 표현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이 형식화되고 경직화되어가는 특색을 잘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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