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민속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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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민속문화재 제1호   덕온공주 당의 (德溫公主 唐衣) 

조선시대 순조(재위 1800∼1834)의 셋째 공주인 덕온공주가 입었던 당의이다. 이 옷은 공주의 손녀인 윤백영이 저고리와 노리개, 원삼 등과 함께 아버지인 윤용구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7세 되던 해에 대궐에 입궐하면서 자신의 몸에 맞게 고쳐 입었다고 한다.
당의란 조선시대 궁중과 사대부 여인들이 저고리 위에 입던 예복으로, 모양은 저고리와 비슷하지만 앞과 뒤의 길이가 길고 옆이 터져 있는 옷이다. 덕온공주 당의는 자주색 비단에 옷 전체에 금실로 수(壽)·복(福)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 옷은 착용자 신분이 뚜렷하고 연대가 확실한 왕실의 유물로서 조선 후기 상류층의 복식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호   심동신 금관조복 (沈東臣 金冠朝服)

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1824∼?)이 입던 금관조복이다. 조복이란 문신과 무신들이 동지와 설날, 나라에 경사가 있을때나 종묘와 사직에 제사지낼 때 입었던 옷으로 금관조복이라고도 한다. 심동신금관조복으로 지정된 유물은 금관, 적초의, 적상, 청초의(청초중단), 운학금환수, 패옥, 서대, 홀 등이다.
금관은 5개의 금색선이 붙여진 오량관으로 나무비녀로 고정시키게 되어있다. 조복인 적초의는 날씨가 더울 때 쓰는 항라로 만든 붉은색의 홑옷로, 깃은 직선이고 넓은 동정이 달렸으며 소매가 넓고 양 옆이 트였다. 청초의는 조복인 적초의 바로 안에 입는 옷으로 중단이라고 하는 청색 명주로 된 홑옷이다. 직선으로 된 깃에 동정이 있고 소맷부리와 도련 등에 검은선이 둘러져 있다. 적상은 조복인 적초의와 같이 항라로 만들었으며, 전체를 잔주름으로 처리하였고 앞 3폭, 뒤 4폭의 양식으로 앞면이 뒷면보다 좁게 되어 있다. 운학금환수는 후수를 말하는데 큰대와 함께 달려 있으며 붉은색 바탕에 파란색, 노란색, 흰색의 세가지 색으로 구름과 학을 수놓았다. 윗부분 양쪽에는 금환 2개가 달려있다. 패옥은 조복을 입을 때 허리 양 옆에 하나씩 달아 늘어뜨리던 장신구로 한쌍이 온전히 남아있으며 위에는 놋쇠로 된 고리가 달려있다. 서대는 조복에 쓰던 허리띠이다. 홀은 조복을 입을 때 양손에 쥐어 예를 표시하던 물건으로 상아로 만들었다.
심동신 금관조복은 1890년대를 전후한 구한말의 유품으로 부속품까지 양호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어 복식사적 가치가 크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호   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 (光海君 內外 및 尙宮 옷) 

조선시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광해군 비(妃) 유씨, 그리고 궁중의 정5품 상궁이 입었던 의복 4점이다. 1965년 해인사 장경판고(藏經板庫)를 수리할 때 남쪽 지붕 아래 구멍에서 건물 완공에 대한 기록과 상궁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 이 의복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의류는 담청색 직령 1점, 백삼 1점, 홍삼 1점, 자주저고리 1점 등 4점이다.
이 의복들은 재봉질 못지 않은 정교한 바느질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세련되었던 바느질법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의복 습관을 잘 나타내고 있어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4호   외재 이단하 내외 옷 (畏齋 李端夏 內外 옷) 

조선 중기의 문신 이단하(1625~1689)와 그의 부인이 입었던 옷과 머리 장식품들이다. 외재 이단하는 송시열의 제자로 현종 3년(1662)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때에는 대제학에 올랐으며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재직할 때에는 청렴하기로 이름이 났고 죽은 뒤에는 그의 학문과 충성심을 높이 여겨 나라에서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 유물들은 좌의정 시절 외재 이단하가 입었다고 전해지는 중치막 1점과 그의 부인이 입었던 대례복 1점, 누비저고리 1점, 그리고 머리 장식품인 봉대 1점, 다리 1점, 도투락댕기 1점, 용잠 1점 등 모두 7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치막은 사대부들이 관복 속에 입거나 겉옷으로 평소에 입는 옷인 창의의 일종으로, 지금의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동정이 없고 소매가 넓고 길며 옆이 터져있는 흰 모시로 만든 겉옷이다.
대례복은 녹색으로, 어깨와 밑부분에 금실로 수놓은 넓은 단이 있고 안쪽은 붉은색으로 선이 둘러져 있다. 뒤가 앞보다 길고 소매가 길고 넓으며, 소매 끝에는 홍(紅)·황(黃)색의 줄과 덧댄 소매인 흰색의 한삼이 붙어 있다. 대례복을 입을 때 큰 머리를 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103㎝나 되는 가발과 자주색 바탕에 금박을 입힌 도투락댕기, 동(銅)에 금을 입힌 용무늬가 있는 비녀, 그리고 붉은색 바탕에 봉황무늬를 금박한 봉대 등은 함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 누비저고리는 방한용으로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식은 시대에 따라 그 양식이 달라지는데 이 유물은 시대와 착용자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조선 중기의 복식 형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5호   강릉 선교장 (江陵 船橋莊)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예전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은 면적으로 조성되어 있을 때 배를 타고 건너다니던 배다리마을(선교리)에 위치하여 ‘선교장(船橋莊)’이라 붙였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 하에 전체가 건축된 것이 아니라 생활하면서 점차 증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안채는 이내번이 1700년대에 처음 지은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의 여느 상류 주택과 같이 대가족이 함께 생활하던 공간이었므로 (안채의) 부엌 공간을 크게 하였으며 집의 규모에 비하여 소박하고 민가적인 풍취를 나타내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ㄱ'자형 건물로 이근우가 1920년에 지었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이후(李厚)가 순조 15년(1815)에 지었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 (안, 옆, 위)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한꺼번에 모든 건물을 짓지 않은 까닭에 통일감과 짜임새는 조금 결여되어 있으나,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6호   사영 김병기 일가 옷 (思穎 金炳冀 一家 옷)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병기(1818∼1875)와 그의 부인 송씨, 아들 김용규와 손자 김승진이 입었던 옷이다. 김병기는 헌종 13년(1847)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좌찬성까지 오른 인물이다. 아들인 김용규는 참판을 지냈으며 손자인 김승진은 정9품의 벼슬을 지냈다.
유품에는 김병기 조복과 제복이 각각 1점씩, 구군복 2점, 쾌자 2점, 땀받이용 배자류 1점, 아들 김용규와 손자 김승진의 관복 각각 1점씩, 부인 송씨의 원삼 2점과 그 밖에 아들 김용규의 호패와 술이 남아있다.
조복은 신하가 왕에게 아침 문안을 드릴 때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입던 옷이며, 제복은 왕이 종묘사직 등에 제사 지낼 때 함께 참여한 신하들이 입었던 옷이다. 구군복은 문관과 무관이 입던 군복이며, 쾌자는 전복이라고 부르는 옷으로 구군복을 차려 입을 때 협수 위에 입는 옷이다. 배자는 저고리 위에 덧입는 조끼 모양의 옷이며, 원삼은 궁중의 여인들과 사대부인들의 대례복일 뿐만 아니라 결혼식을 올릴 때 신부의 예복으로도 사용하였던 옷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7호   통영 문화동 벅수 (統營 文化洞 벅수) 

통영 문화동 벅수는 세병관(국보 제305호)으로 오르는 길가 오른쪽에 서 있는 석장승이다. 벅수라고도 불리는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 등에 세워져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 역할도 한다. 보통 장승은 남녀 한 쌍이 짝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문화동 벅수는 하나만 있는 독장승으로, 이 지역의 위치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낮은 지대로 기(氣)를 보강해주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졌다.
통영 문화동 벅수는 험상궂은 듯 하면서도 친근하고 익살스러운 민간 특유의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유례가 드문 독장승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있고 둥근 눈은 튀어나왔으며 코는 삼각형으로 뭉툭하다. 머리 위에는 벙거지를 쓰고 턱 밑에는 굵은 선으로 세 가닥의 수염이 표시되었다. 활짝 웃고있는 입에는 송곳니가 길게 삐져나와 있는 익살스러운 모습이다. 벅수의 몸통 앞면에는 ‘토지대장군(土地大將軍)’이라고 새겨있고, 뒷면에는 '광무십년병오팔월일동낙동 입(光武十年丙午八月日同樂洞 '라는 글씨가 있어서 고종 10년(1906)에 이 벅수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   구례 운조루 고택 (求禮 雲鳥樓 古宅) 

조선 중기의 집으로 영조 52년(1776)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金環落地)’라 하는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집의 구성은 총 55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T자형으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에는 큰 부엌이 없는데 이곳에는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사랑채와 직각을 이룬 누마루가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있어 특이하다.
안채는 사랑채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사랑채에 비해 규모가 매우 크며 평면이 트인 'ㅁ'자형이다. 중심부분은 대청이며, 좌우로는 큰방과 작은방이 자리잡고 있다.
행랑채는 '一'자형으로 2칸이 앞쪽으로 튀어나와 누형식을 취하고 있다. 1칸은 방이고 다른 1칸은 다락으로 되어있다. 누각아래 기둥 서쪽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층계로 하지 않고 경사진 길로 만들어 특이하다.
사당은 안채 동북쪽에 있는 건물로 따로 담장을 둘렀으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운조루는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예이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살림살이와 청주성의 지도, 그리고 상당산성의 지도 등의 유물도 상당수 보존되어 있다.
이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9호   삼덕리 마을제당 (三德里 마을祭堂) 

제당은 마을의 신앙의식을 행하는 곳으로 인간의 일상생활과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성지의 하나이다.
장군봉과 마을 입구에 넓게 분포하는 삼덕리마을제당은 신을 모셔놓고 위하는 집(당집)과 여러 개의 신이 있다고 믿고 섬기는 대상물(당산)로 구성된다. 장군당 안의 장군신도(將軍神圖)와 2개의 목마 중 큰 목마, 원항마을 입구의 돌장승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도 천제당과 당산나무 10여 그루, 나머지 돌장승 2쌍이 이곳의 동제당이다.
장군봉 정상에 위치한 장군당과 천제당은 각각 장군신과 천신을 모신 곳으로서 규모가 작고 조촐한 건물이다. 장군신화는 장군당 내부에 걸려있는 그림으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장군의 단호함이 잘 표현되었다. 이 앞에는 목마 한 쌍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큰 것은 원래의 철마를 도둑맞은 후 1940년경 새로 만들어진 것이고, 작은 것은 근처에 살던 일본인이 기증한 것이다. 장승은 대청·관유·원항마을 입구에 남녀 한 쌍으로 세워졌다. 관유마을의 것만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고 나머지는 돌로 만든 석장승이다.
원항마을의 동제는 설날 첫새벽에 시작되어 며칠에 걸쳐 진행되는데, 마을 공동으로 제사비용을 추렴하고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한다. 마을에서 선출된 대표가 제관이 되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제사를 주관한다. 천제당에서 천제를 지내고 장군당에서 장군제와 용마제를 지낸 다음 산기슭 바위에서 잡신제를 지낸다. 이시간 각 가정에서는 조상제를 지낸 후 장승 앞에서 벅수제를 지낸다. 그리고 원항마을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내며 어로의 무사고를 기원하는 별신제를 지낸 후 마을 주민 모두가 어우러지는 풍물놀이를 끝으로 동제는 막을 내린다. 원항마을의 동제는 마을 전체를 위한 제사로서 마을 구성원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기능을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마을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동제가 잘 보존되어있고 다양한 신앙 대상물이 공존하고 있어 민간신앙과 마을신앙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 지정명칭변경(2005.2.18) : 국가민속문화재 명칭변경계획에 따라 「삼덕리부락제당」에서「삼덕리마을제당」으로 변경함

국가민속문화재 제10호   창녕 진양하씨 고택 (昌寧 晉陽河氏 古宅) 

창녕 지방에 있는 옛집으로 안채·사랑채·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안채만 지정되어 있다. 안채는 현소유자 하경목 씨의 18대 조상이 이 마을에 들어와 세종 7년(1425)에 지은 건물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수리과정 중에 ‘건륭 25년’<영조 36년(1760)>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이 때에 다시 지었거나 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중부 이남지방에서 일반적인 앞면 4칸·옆면 1칸의 '一'자형 홑집으로, 왼쪽부터 작은방·대청·큰방·부엌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길게 빠져나온 처마는 이 집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빠져나온 처마의 길이가 기둥의 높이에 가까울 정도로 깊다. 이는 일조량이 높은 남부지방의 기후적 특성을 고려한 것으로 여름날 최대한 햇볕이 집안으로 적게 들어오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지붕은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인 볏짚을 사용하여 만든 초가지붕과 달리 억새풀을 엮어 얹은 억새지붕으로 하였는데, 비가 올 경우 빗물이 지붕에 고이지 않고 곧바로 억새풀 줄기를 따라 흘러내리도록 하여 집안으로 비가 새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지붕의 수명도 일반 초가지붕보다 길다.
대청마루는 통나무를 윗부분만 편평히 깎고 아래는 껍질만 벗겨 그대로 깔았는데 이것은 민가에서 오래전부터 해오던 방식이다. 또한 목재는 못을 쓰지 않고 구멍을 뚫어 연결하였으며, 천장은 흙을 깔지 않은 상태로 구성하여 가볍게 한 점 등이 이 고택의 특징으로 이러한 점들은 중부 이남지방 살림집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앞마당에는 작은 텃밭을 가꾸었고 부엌 앞쪽에는 장독대가 있으며, 안채 뒤로는 꽃계단을 꾸며 몇 그루의 오래된 나무들이 어울러 숲을 이루고 있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1호   나주 불회사 석장승 (羅州 佛會寺 石장승) 

나주 불회사 입구에 서있는 2기의 돌장승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데 이 장승 역시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수문신상이다.
불회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높은 산을 뒤로한 협곡에 자리잡고 있다. 절 앞 300m 되는 지점의 길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있는 이 장승은 남·여의 모습으로 구별된다. 남장승은 선이 깊고 뚜렷하며 수염이 표시되었고, 머리 위에서는 상투를 올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입 가자장자리에는 송곳니가 아래로 뽀족하게 돌출되었고 몸체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란 이름이 새겨있다. 여장승은 남장승에 비해 표정이 온화하고 얕은 선으로 표현되었다. 미소 띤 얼굴에 몸체에는 ‘주장군(周將軍)'-원래 명칭은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이란 이름이 있다. 두 장승 모두 크고 둥근 눈에 두리뭉실한 주먹코이다. 얼핏보면 제주도의 돌하루방을 옮겨다 놓은 것 같기도하고 나주운흥사석장승(국가민속문화재 제12호)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나주 불회사 석장승은 숙종 45년(1719)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민간의 무속신앙과 불교신앙이 혼합된 상징적인 조형물로서 험상궂은듯 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모습이 친근감을 준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2호   나주 운흥사 석장승 (羅州 雲興寺 石장승) 

나주 운흥사 입구에 있는 남녀 한 쌍의 돌장승이다. 사찰 앞에 세우는 사찰장승은 경내의 부정을 금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기능을 지닌다. 석장승은 대부분 무서운 듯하면서도 인자함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되며 절의 경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운흥사 석장승은 사찰에서 500m쯤 떨어진 밭 가운데 마주보고 서 있는데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의 모습이다. 남장승은 높이 270㎝, 둘레가 192㎝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로 크고 둥근 눈에 뭉툭한 코, 송곳니가 삐져나와 있지만 인자한 할아버지의 얼굴이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턱 밑에는 八자형 수염이 표시되었으며 몸체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란 이름이 새겨있다. 여장승은 웃는 표정으로 소박한 모습이다. 깊은 선으로 둥근 눈이 표시되었고 입 언저리의 잔 수염과 주걱턱 표현이 인상적이다. 몸체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란 이름이 새겨있다.
사찰 수호의 기능을 지니고 있는 운흥사 석장승은 여장승의 뒷면에 기록된 조선 숙종 45년(1719)이라는 내용을 통해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3호   경산 정원용 의대 (經山 鄭元容 衣帶) 

정원용(1783∼1873)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순조 2년(1802)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진을 거듭하여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정원용의대로 지정된 유품으로는 조복 3점, 상 1점, 후수 1점, 패옥 1점, 홀 2점, 청초의 1점, 대례복 1점, 구군복 2점, 전복 3점, 제복 1점, 구군복대 2점, 술 4점, 장도 1점, 호패 7점 등이 있다.
조복은 관복의 하나로 왕이나 신하가 천자에 나아갈 때 입는 옷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으며, 다른 말로 ‘금관조복’이라고도 한다. 상(裳)이란 제복이나 조복 밑에 받쳐입는 치마 형태의 옷이다. 후수는 제복이나 조복 등을 입을 때 뒤쪽에 늘어뜨리던 수놓은 천으로, 관리의 등급을 나타냈다. 패옥은 법복이나 조복 및 제복을 입을때 양옆으로 달았던 옥(玉)으로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홀은 신하들이 왕을 뵐 때 손에 쥐는 물건으로, 왕의 가르침이나 임금에게 올리던 글을 잊지 않으려고 사용하였으나, 후에는 의례용으로 제도화 되었다.
청초의는 삶아서 익히지 않은 푸른색의 명주실로 만든 옷으로 1품에서 9품까지 입었던 제복이다. 대례복은 국가의 중대한 의식 때 착용하였다. 구군복은 조선시대 문관과 무관들이 갖추어 입던 군복이며, 구군복대는 허리띠이다. 전복은 다른 말로 ‘답호’라고 하며, 소매, 무, 앞섶이 없고 뒤솔기가 허리 아래로 트여있다.
제복은 왕이 종묘사직 등에 제사 지낼 때 함께 참여한 신하들이 입었던 옷으로 머리에는 양관을 쓰고 푸른색 청초의를 입었다. 술은 여러 가지 색깔로 물들인 명주실로 노리개에 사용된다. 장도는 몸에 지니는 칼로 남자는 저고리 고름이나 허리띠에 차고, 여자는 치마속 허리띠에 차거나 노리개에 연결하여 가지고 다녔다. 호패는 호구 파악, 유민 방지 등의 목적으로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한 것으로 이 유물은 상아 ·황양목 ·배나무 ·흑각 등으로 된 호패 7점이다.
경산정원용의대로 지정된 유물들은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복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4호   고창 오거리 당산 (高敞 五巨里 堂山) 

고창읍 중앙동에 위치한 당산이다. 당산은 민간신앙에서 신이 있다고 믿고 섬기는 것으로, ‘당’혹은 ‘신당’이라고도 한다. 중앙동을 중심으로 동·서·남 방향의 상거리·하거리·중거리에 각각 1쌍의 당산이 있고, 마을 북쪽의 교촌리에 3기의 당산이 있다. 이곳에서는 각 쌍의 당산을 할아버지당, 할머니당으로 부르는데, 그 이름에 따라 외형을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은 없다. 처음에는 당산 5곳 모두 자연석이었지만 풍수지리설에 따라 중앙과 남·서방향에만 기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 화강암을 기둥모양으로 다듬어 세웠는데, 이것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중앙동·중거리·하거리 할아버지당이다.
중앙동 할아버지당은 6각기둥 정상에 둥근 갓을 쓴 모습이다. 중거리 할아버지당이 서 있는 곳은 예전의 당산터로, 4각의 돌기둥 위에 네모난 돌갓을 쓰고 있다. 하거리 할아버지당은 동네소유의 넓은 당산터에 위치하는데 세 당산 중 가장 높은 돌기둥으로 역시 갓을 올린 모습이다. 이들 당산이 쓰고 있는 갓모양을 본 떠 ‘삿갓비석’, ‘갓당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당산제는 매년 음력 정월에 지냈으나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다만 뜻 있는 개인이 정성을 드린다고 한다. 각각의 당산에 새겨진 기록으로 보아 모두 같은 해인 조선 순조 3년(1803)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5호   남원 실상사 석장승 (南原 實相寺 石장승)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실상사 입구에 있는 3기의 돌장승 역시 경계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을 막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만수천의 해탈교를 건너기 전 마을쪽에 있는 돌장승이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고, 해탈교를 건너자 마자 길 좌우에 2기의 돌장승이 마주보고 서 있다. 오른쪽 논두렁 가에 있는 돌장승이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고, 왼쪽의 괴목 아래 서 있는 돌장승이 대장군(大將軍)이다.
3기의 석장승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눈에 뭉툭한 주먹코이다. 윗 송곳니 두 개가 삐져나와 험상궂은 듯 하지만 입가의 미소가 순한 심성을 드러내고 있다. 길게 수염이 표시되고 몸체에는 좌우 각각 '상원주장군', '대장군', '옹호금사축귀장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있다. 다만 수염이 반대로 향하고 있어 상원주장군과 대장군은 대칭적인 한 쌍을 표현한 것 같다. 대장군의 기단석(基壇石)과 상원주장군의 뒷면에 있는 기록을 통해 실상사 석장승들은 조선 영조 원년(1725)과 영조 7년(1731)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6호   방상시 탈 (方相氏 탈) 

방상시탈은 궁중에서 나례나 장례때 악귀를 쫓기위해 사용했던 탈이다. 궁중에서는 임금의 행차나 사신의 영접 등의 행사 때 사용되었는데, 붉은 옷에 가면을 쓴 방상시 4명과 각종 가면을 쓴 사람들이 때리기도 하고 불이나 색깔 등으로 위협하여 악귀를 쫓는다. 일종의 연극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런 의식은 나라의 큰 일을 앞두고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중요한 의식 중의 하나이었던 듯 싶다.
장례때에는 발인 행렬의 맨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묘지에 도착하면 시신이 들어갈 자리의 잡귀를 쫓는다. 이 때 사용한 탈은 종이와 나무로 만들어지는데 한 번 쓴 탈은 시신과 함께 묻거나 태워버린다. 이런 풍습은 중국 주(周)나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신라 5∼6세기경부터 장례 때 사용되었고, 악귀를 쫓는 의식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정종 6년(1040)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방상시탈은 1970년 창덕궁 창고에서 장례용구와 함께 발견되었다. 길이 78㎝, 너비 73㎝의 대형 탈로서 소나무에 얼굴모양을 파고 4개의 눈과 코, 입, 눈썹 등을 새겼다. 웃는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 커다란 두 귀가 인상적이다. 눈썹에는 녹색과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있으나 현재는 거의 나무색에 가까운 갈색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이 탈은 네 눈이 뚫려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실제 장례에 쓰던 것이라기 보다는 실물 크기로 제작된 모형이거나 궁중에서 악귀를 쫓던 의식용 탈로서 벽에 걸어두고 귀신을 쫓던 가면이 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탈은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던 방상시 탈 중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의 유물로서 장례 연구 및 민속 연희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7호   국사당의 무신도 (國師堂의 巫神圖) 

국사당에 있는 무속신을 그린 그림이다. 국사당은 서울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명성이 높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굿당이다. 원래의 국사당은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으나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건립하게 되자 해체하여 지금의 자리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국사당 내부로 들어서면 벽면 가득히 무속(巫俗) 신앙에서 모시는 신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대부분의 무신도는 비단 바탕에 채색한 그림으로 모두 21점이며, 이 밖에도 앞서 간 무녀의 영혼의 상징물로 여겨지는 명두(明斗) 7점이 있다. 피리를 불며 줄을 타고 있는 창부씨(혹은 광대씨라고도 함), 칼을 짚고 앉아있는 별상님, 산신, 최영 장군, 출산을 관여하는 삼불제석, 민간신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칠성님, 용과 함께 그려진 용왕대신, 고깔을 쓴 무학대사, 고려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님, 조선 태조를 그린 아태조, 두 소년을 앞세우고 앉아있는 호귀아씨 등 여러 점이 걸려있다. 이들 무신도 위에는 명두가 걸려있는데, 명두는 둥근 모양의 놋쇠 제품으로 고대의 청동거울을 연상시키는 무녀 계승의 증표이다.
국사당 무신도는 무당들의 일반적인 신당이나 기타 굿당의 것들에 비해 필치가 우수하고 기품이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큰 대청에 걸려 있는 대부분의 무신도는 19세기 전반 준화원급의 화가에 의해 그려진 뛰어난 것으로 평가 된다. 비교적 오래되고 품격이 높은 이들 무신도는 조선시대 무의 신 관념과 국당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된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8호   부안 서문안 당산 (扶安 西門안 堂山)

당산은 민간신앙에서 신이 있다고 믿고 섬겨지는 대상물이다. 부안 서문안 당산은 높은 돌기둥과 돌장승이 각각 1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기둥은 마을 밖의 부정한 것에 대한 침입을 막고 마을의 평안함을 위해 세운 솟대의 일종이다. 이 돌기둥은 각각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으로, 할아버지 당산은 서문안 당산의 주신으로서 꼭대기에는 돌로 조각된 새가 얹혀 있다. 할머니 당산은 새를 따로 얹지 않고 돌기둥 윗부분에 새겨서 표현한 특징을 보인다.
돌장승 역시 남녀 한 쌍이다. 할아버지로 불리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탕건(모자의 일종)을 쓰고 수염이 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조금 작은 모습으로 몸체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새겨져 있다.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둔 신앙물 중 하나인 이 돌기둥은 ‘짐대’라고도 하는데 이곳의 지형이 배가 떠있는 형상과 같아서 안정감을 주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보여진다.
마을에서는 돌장승 2기와 돌기둥 2기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마을의 신으로 모시며, 매년 음력 정월초하루 자정을 전후해서 당산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공동체의식이 강해서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사를 드렸지만 최근에는 몇 집만이 참여하는 것으로 축소되었고 이들의 위치도 보호관리상 할머니당산 쪽에 모아두고 있다.
서문안 당산의 돌기둥에는 조성 연대와 건립자를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어 숙종 15년(1689)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지만, 돌장승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부안 서문안 당산은 보통 나무로 세워지는 장승과 솟대가 돌로 만들어지는 변화의 과정을 볼 수 있는 민속자료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9호   부안 동문안 당산 (扶安 東門안 堂山) 

부안 동문안 당산은 돌기둥(당산)과 돌장승 한 쌍(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으로 이루어진 당산이다. 마을 밖으로부터 부정한 것의 침입을 막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로 세운 돌기둥을 중심으로 동쪽 50여m 지점에 당산나무가 있고, 그 사잇길 양쪽에 한 쌍의 돌장승이 마주보고 서있다.
돌기둥은 화강암을 깎아만든 것으로 그 꼭대기에 돌로 조각한 오리가 올려져 있다. 돌기둥 주변은 당산제에서 쓰인 동아줄로 칭칭 감아놓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정상부분의 오리와 그 밑의 기둥이 약간만 보일 뿐이다. 당산나무 서쪽에는 몸체에 ‘상원주장군’이라고 새겨진 남장승이 머리에 벙거지모양의 모자를 쓰고 서 있고, 동쪽으로는 ‘하원당장군’이라고 새겨진 여장승이 서 있다. 여장승은 남장승보다 키가 크지만 모자는 쓰고 있지 않은 모습이다.
마을에서는 2년마다 음력 정월보름에 당산제를 지낸다. 새끼를 꼬아 만든 동아줄로 줄다리기를 한 다음 그 줄을 돌기둥에 감아 놓은 후 제를 올린다. 동아줄을 돌기둥에 감는 것을 ‘옷입힌다’고 하는데, 마을 전체의 복을 기원하고 농사의 풍요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의미로 신앙물을 인격화 함으로써 돌기둥을 동제의 주신으로 받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돌기둥과 돌장승 모두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마을신앙을 보여주는 민속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0호   남원 서천리 당산 (南原 西川里 堂山) 

 

남원 서천리 당산은 당산나무, 돌장승(벅수), 솟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남녀 한 쌍인 서천리 당산은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m 지점에 마주보고 서 있고, 주변에 당산나무가 있다. 장승과 솟대를 함께 세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전라도 지방에 남아 있는 당산신앙의 한 형태로 원래는 이곳에도 솟대를 함께 세웠던 것으로 보여지지만 마을 중앙에 있었던 솟대의 모습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마을의 지세가 허한 곳을 방어하고 서쪽을 진압하기 위해 세웠다고 하는 석장승의 몸체에는 각각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남자 벅수인 방어대장군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아래로 쭉 뻗은 송곳니가 있다. 가슴에 수염이 있으며, 귀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여자 벅수인 진서대장군은 머리에는 벙거지모양의 돌모자를 쓰고 둥근 눈에 주먹코와 귀가 있다. 다른 여자 벅수에서는 찾아보기 드물게 속눈썹이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석장승들은 만든 이가 다른 듯 벙거지의 제작형식이나 표현기법이 서로 다르다. 구전에 따르면 장승이 부부싸움을 하다 진서대장군의 목이 부러져 마을 사람들이 붙였다고 한다.
매년 음력 2월 초하룻날 밤에는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당산나무에 제사를 지낸 다음, 석장승에게도 간단한 제를 지냈다. 서천리 당산의 제작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민간신앙을 보여주는 한 형태로서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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