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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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민속문화재

익선관

 

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   정충신장군 유품 (鄭忠信將軍 遺品) 

정충신(1576∼1636) 장군은 17세의 어린 나이로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전쟁에 참가했으며, 무과에 급제한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을 수습하여 진무공신으로 봉해졌다. 그 후 정묘호란에서 공을 세우고 포도대장, 경상도 절도사 등을 역임했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천문·지리·역술·의술 등 여러 면에 걸쳐 뛰어났으며, 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정충신 장군의 유품들은 서산군 지곡면에 있는 정충신 장군의 사당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1975년 도난당하고 2달 만에 다시 찾았는데, 그 때 투구가 없어져 사진만이 남게 되었다. 현재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유품은 모두 5점이다.
갑옷은 1630년 5월 가도에서 일어난 병란을 토벌할 때에 인조가 활과 화살, 검과 함께 하사한 것으로 그가 생전에 입었던 군복이다. 길이 116㎝이며, 면 3겹을 2㎝ 간격으로 꼬아서 누빈 위에 황색 단을 입히고 그 위에 징을 박은 것으로 어깨 부분은 철로 만들었고 가슴 부분에만 가죽의 흔적이 남아있다.
서군사명기(西軍司命旗)는 총길이 138㎝, 너비 55.5㎝로 전쟁 때 사용했던 깃발이다.
영정은 족자로 된 초상화로, 머리에는 검은색의 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고 중국식 의자에 앉아 있는 장군의 전신(全身)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향로는 좌우에 손잡이가 있으며, 향로 주위에 산과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다리는 굽다리가 3개이며, 반구형의 뚜껑 맨 위에는 뿔달린 용의 장식이 달려 꼭지 역할을 하고 있다.
향합 역시 둥그런 형태에 굽다리가 3개이고, 뚜껑 중앙에 꼭지가 달려 있으며 향로에 비해 형태가 훨씬 소박하고 표면에 무늬가 없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7호   학성 이천기 일가 묘 출토복식 (鶴城 李天機 一家 墓 出土服飾) 

학성 이천기 일가 묘 출토복식은 이천기(李天機, 1610∼1666) 묘와 그의 부인 흥려 박씨의 묘, 그리고 이천기의 셋째 아들인 이지영(李之英)과 그의 부인 평해 황씨의 부부 합장묘에서 1969년에 출토된 유물이다.
이천기의 묘 출토복식(2종 3점)은 광다회대 1점, 면포 솜소모자·명주 솜소모자 2점이다. 이천기의 부인 흥려 박씨의 묘 출토복식(3종 3점)은 면포 솜장옷 1점, 옷감 1점, 면포 홑치마 1점이다.
이천기의 셋째 아들인 이지영과 그의 부인 평해 황씨의 부부 합장묘 출토복식(3종 4점)은 난봉화문단 겹장옷 1점, 명주 솜누비치마 1점, 면포 솜버선 1쌍이다.
※ 2004년 6월 18일 중요민속자료 제37호 울산 이휴정 소장 출토복식에서 학성 이천기 일가 묘 출토복식으로 명칭변경되었다.(2004년 2월 관계전문가의 정밀조사 실시 결과 지정명칭 변경과 세부 유물명칭을 정정하고 면포홑치마 1점을 추가 지정하였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8호   정공청 유품 (鄭公淸 遺品) 

정공청 장군이 임진왜란(1592)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착용했던 투구와 갑옷, 장갑, 혁대, 화살 등의 유품이다.
정공청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여 울산, 서생포, 기장 등지에서 백여배에 달하는 왜군들과 싸워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공을 세웠으며 이 때문에 그는 1등, 그의 아들은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현재 그의 유물들은 후손인 정철환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위탁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원(圓)모양의 철로 만든 투구는 부식이 심한 상태이지만 원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정면에는 앞쪽으로 3㎝, 길이로 17㎝ 정도의 해가리개를 양끝과 가운데 못을 박아 달았고, 목가리개가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것은『세종실록』중 ‘오례(五禮) ’중에 나오는 병기(兵器)가운데 원두(圓兜)와 비슷한 모습이다.
갑옷은 남자들의 겉옷인 포(袍)의 형태를 하고 있다. 겉은 화려한 초록색이고 안은 명주인데 천 사이에 2㎝ 간격으로 누빈 2겹의 무명천이 들어 있다. 앞쪽에는 옷을 여밀 수 있도록 매듭으로 만든 4개의 단추가 있으며 어깨에는 중앙에 가운데가 꺾일 수 있도록 경첩장식을 달아 팔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였다. 옷의 위와 아래에는 놋쇠로 만든 못을 박았고 목둘레와 소매끝, 아래단에는 가죽으로 단을 대었다.
정장군의 유품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오늘날의 것과 모습이 거의 같은 장갑이다.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활을 쏠때 낀 것으로 보이며 엄지손가락에는 뿔로 만든 깍지가 붙어 있다.
그밖에 가죽으로 만든 길이 80㎝, 125㎝의 혁대와 일본도와 비슷한 너비 3.5㎝, 길이 85㎝의 철제로 만든 도검(刀劍), 6개의 화살 등이 남아 있다.
이 유물들은 임진왜란 당시의 것으로 복식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서 높은 평가 받고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9호   고창 신재효 고택 (高敞 申在孝 古宅) 

판소리 이론가면서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1812∼1884)가 살던 집이다.
철종 1년(1850)에 지은 것으로 짐작하며 광무 3년(1899) 그의 아들이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 집은 소담한 초가집 사랑채로 보고 있는데 중요 민속자료 지정 전까지 고창 경찰서의 부속 건물로 쓰였다. 지금 건물은 많이 개조되고 변형된 것을 국가에서 관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고자 다시 수리한 것이다.
앞면 6칸·옆면 2칸 규모에 '一'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으며 지붕은 초가지붕이다. 구성은 앞에서 볼 때 왼쪽부터 부엌 1칸, 방 2칸, 대청 1칸, 2칸을 합하여 통 1칸으로 만든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엌을 뺀 나머지 앞면 5칸은 반칸 툇마루를 두었다.
부엌과 방 사이에 쌍여닫이 출입문을 만든 점과 대청 양쪽 방으로 연결하는 문을 달지 않은 점이 특이한 구조로 눈길을 끈다. 현대 판소리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명인(名人) 신재효의 옛 집으로서 가치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40호   홍극가 묘 출토복식 (洪克家 墓 出土服飾) 

1974년 안동댐의 건설로 근처의 묘를 이장할때 부림홍씨(缶林洪氏)의 14대조부인 홍극가(?∼1670)의 무덤에서 출토된 수의들이다.
수의란 윤달가운데 좋은 날을 골라 솔기나 매듭을 없이 하여 죽은 이가 편안히 저승길을 가기를 염원하며 지은 옷으로 여기서 발견된 수의는 중치막 1점, 도포 1점, 누비바지 1점, 버선 1족 등 총 4점이다.
중치막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관복을 입을때 안에 받쳐 입었으나 일반인들은 외출복으로 사용하였던 지금의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옆이나 뒤가 터져있는 옷이다. 이 옷은 옷깃이 곧고 소매는 넓으며 양 옆이 트여져 세 자락으로 되어있다. 길이 115㎝, 등솔에서 소매끝까지의 화장길이는 105.5㎝인 흰색의 무명옷이다.
도포는 사대부의 외출복으로 깃이 곧고, 양쪽 겨드랑이 아래를 다른 폭의 천으로 댄 무가 있으며 소매가 넓다. 허리부터 뒤 중심이 트여있고, 뒷자락이 하나 더 있어 말을 타거나 앉을 때 편하도록 되어있다.
바지는 반쪽만이 남아있는데, 이는 후손들이 시신으로부터 의복 벗기는 것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찢어졌다고 한다. 겉감은 명주로, 안은 솜을 얇게두어 1㎝간격으로 누빈 겨울용 바지이다.
버선 역시 무명으로 되어있으며 발등의 솔기부분인 수눅선이 직선형이면서 발등부분에서 모난 형태로 꺾여있다. 길이는 24.5㎝로 지금의 버선보다 짧다.
기존에 출토된 수의 중에는 기운자국이 보이는 것도 있어 조선시대 평상복을 수의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수의 역시 직물이 귀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평상복으로 추정된다. 유물중 중치막이나 도포는 박장군의 옷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며, 바지는 당시의 것이 몇 점 전해지기는하나 명주에 솜을 넣고 정교하게 누빈 바지는 이것이 유일한 것으로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지정명칭 변경 : 국가민속문화재 명칭변경계획에 따라「안동홍씨수의」에서 「홍극가묘출토복식」으로 명칭 변경되었다. (2005. 2. 18)

국가민속문화재 제41호   운봉수 향낭 (雲鳳繡 香囊) 

향냥이란 조선시대 여인들 향을 넣어서 몸에 지니고 다니던 주머니로, 향낭에는 포도무늬나 십장생 등을 수놓아 부귀와 장수 등을 기원하였다.
거북이 모양의 이 수향낭은 조선시대 여인들이 몸에 지니던 길이 30㎝ 미만의 향낭들에 비해 매듭술까지의 총길이가 87.5㎝나 되는 대형이다. 흰색 공단의 바탕천 위에 나비, 봉황, 박쥐 등의 길상문이 화려하고 정교한 궁중자수기법으로 수놓아져 있어 궁중 여인들의 내실에 장식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수(平繡), 자련수(刺連繡), 매듭수의 각종 기법을 잘 구사하고 있는데, 위로는 박쥐매듭이 있고 아래로는 49㎝ 길이의 줄이 15줄이나 내려있다. 향낭의 윗부분에는 큰 나비가 날개를 펼쳐 구름과 봉황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수놓았으며, 아래쪽으로는 다섯가지 복을 상징하는 5마리의 박쥐와 장수를 상징하는 불로초가 중심부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수놓아 장식하였다.

국가민속문화재 제42호   일월수 다라니주머니 (日月繡 陀羅尼주머니) 

일월수 다라니주머니는 연화화생도(蓮花化生圖)를 수놓은 주머니 한 쌍이다. 연화화생은 불교를 믿는 신자들이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연화의 개화(開花)에 비유한 것이다.
두 개가 똑같은 연화등(蓮花燈) 모양의 주머니이며 주머니를 중심으로 위는 매듭, 아래는 각기 세 개씩의 괴불을 달고 있는 세개의 연뿌리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록색 공단의 바탕천에 수놓은 문양은 연화좌 위에 연화화생한 보살이 천상을 표현한 해와 달이 있는 연꽃으로 연결된 줄을 합장하는 자세로 잡고 있는 모습이다.
자수에 나타난 문자들로 보아 주머니 하나는 허공화(虛空華)라는 불명(佛名)을 가진 상궁 김씨가, 다른 하나는 묘진화(妙眞華)라는 상궁 류씨가 극락에 가기를 간절히 염원하여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연두색 공단으로 만든 이 주머니의 문양은 3단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만개한 연꽃 가운데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삼족오와 토끼를 수놓았다. 김씨의 주머니에는 해를 상징하는 세발 달린 까마귀, 류씨의 주머니에는 달을 상징하는 방아 찧는 토끼가 수놓아져 있다.
제작연도는 주머니에 자수된 발원자가 똑같이 기유생(己酉生)이라는 것과 뒷면의 기록에 나타난 발원자들의 생년으로 보아 19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국가민속문화재 제43호   오조룡 왕비 보 (五爪龍 王妃 補) 

보(補)는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곤룡포(袞龍袍)나 왕비·세자빈의 적의(翟衣)·원삼(圓衫)·당의(唐衣)의 가슴과 등, 양 어깨에 부착하여 장식한 둥근 천으로 주로 용을 수놓았다. 문양에 따라 ‘용보(龍補)’라고도 하며 형태에 따라 ‘원보(圓補)’라고도 한다.
용은 상상의 동물로 예로부터 천자(天子)나 국왕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왔기 때문에 조선시대 왕의 직계가족들은 용보를 부착하였으며 용의 발톱수로 신분의 구분을 두었다. 즉 왕과 왕비는 오조룡(五爪龍), 왕세자와 세자빈은 사조룡(四爪龍), 왕세손과 세손빈은 삼조룡(三爪龍)의 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말기에는 이러한 제도가 확실하게 지켜지지 않아 대부분의 유물이 오조룡보로 되어있다.
이 오조룡보는 왕비용이며, 초록색의 화문단(花紋緞)에 발톱이 5개 있는 반룡(蟠龍)을 중심에 배치하고, 중심에는 여의주를 수놓아 용의 품격을 높여주었다. 용 주위에 구름 및 바위, 물결, 불로초 등의 장생문(長生紋)을 수놓았다.
바탕직물이 초록색 화문단이므로 초록당의나 원삼에 부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존하는 용보 중에서 보존상태도 좋고 자수가 매우 정교하다.

국가민속문화재 제44호   전 고종 익선관 (傳 高宗 翼善冠) 

 

전 고종 익선관(翼善冠)은 국말 고종이 착용하였던 것으로 전해지는 유물이다. 익선관은 왕이나 왕세자의 상복(常服)에 갖추어 쓰는 관모이다. 상복은 왕의 집무복으로서 곤룡포(袞龍袍), 옥대(玉帶), 흑피화(黑皮靴)로 일습을 이룬다. 백관들이 상복에 착용하는 사모(紗帽)에는 2개의 양각이 좌우 수평으로 부착된 것과 달리 익선관은 각각 2개의 소각과 대각이 하늘을 향해 달려 있어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전 고종 익선관은 모체(帽體)와 양각(兩角)이 모두 자색의 비단으로 겉을 싸주었다. 높이가 18㎝, 지름이 17㎝ 정도이다. 전두부(前頭部)와 후두부 2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이에 짙은 자색의 견사를 굵게 감아 만든 장식선이 앞 중심과 후두부 중앙에 장식되어 있다.
형태를 보면 모정(帽頂)이 낮은 편이며 양각(兩角)이 위로 향하여 있고 양각 가장자리를 쇠철사와 같은 단단한 것으로 형을 잡아 주었으며 가장자리는 검은색으로 둘러있다. 안쪽에도 자적색 비단을 씌어 주었으며 모체(帽體) 뒤에 양각의 하단(下端)을 끼워서 고정시킬 수 있도록 직사각형의 받침대가 달려있다.
이 익선관은 모체 내부골격이 매우 단단하고 정교하게 짜여져 있으며 여러 겹의 한지와 대나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모체의 하단선은 검은 칠로 마무리 되어있으며 전체적으로 지름 약 1㎝ 정도의 고른 간격의 구멍이 있다. 모체의 상단에는 약 0.5㎝가 채 못되는 간격의 죽망(竹網)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모체의 내부 골격에 구멍을 뚫거나 망을 댄 것은 통풍이 잘 되게 하여 착용시 쾌적감을 주려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복잡한 골격 위에는 자색 비단으로 싸주었으나 외부에는 전혀 표시되지 않고 매끈하게 정리되어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45호   전 고종갓 (傳 高宗 갓) 

조선 말 고종황제(재위 1863∼1907)가 착용 것으로 전해지는 갓이다. 이 갓은 고종이 썼다고 전해지는 점과 만든 기법이 정교한 것으로 미루어 진사립으로 보인다. 진사립은 왕이나 높은 벼슬에 있던 사람들만 쓰던 갓으로 머리카락보다 더 가는 죽사(竹絲)를 재료로 하여 대우와 갓의 챙부분을 네겹으로 엮고 그 위에 중국산 촉사를 한올 한올 입혀 옻칠한 것으로 제일 좋은 제품이다. 임금이 쓰는 갓에는 대우 아래에 중국산 실을 물들여 꼰 붉은 실을 돌린다.
갓의 꼭대기부분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중앙을 향하여 있는 네 마리의 박쥐무늬와 네 개의 구름무늬가 섞여 있는데, 무늬는 전체적으로 큰 편이어서 모자의 윗부분을 거의 채우고 있다. 갓끈으로는 호박의 한가지로 누른 빛을 띠는 밀화를 사용하였다. 구슬처럼 둥근 모양의 것과 봉처럼 긴 것을 교대로 꿰어 만들고 중앙에는 원통을 납작하게 자른 것 같은 모양의 밀화 덩어리를 배치하였다. 박쥐무늬와 구름무늬는 왕의 신분을 알려주는 문양이라고 하며, 갓의 꼭대기부분과 은각부분에 이 문양이 섞여 있는 것이 이 갓의 특징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46호   전 고종 패옥 (傳 高宗 佩玉) 

전 고종 패옥(稗高宗佩玉)은 고종황제가 사용하던 것으로 전해지는 패옥이다. 패옥은 왕·왕세자·왕세손·백관의 제복(祭服)조복(朝服), 왕비·왕세자비·왕세손비의 적의(翟衣) 양 옆에 늘어 뜨리는 것이다. 옥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옥패 혹은 패옥이라고 한다.
좌우 2개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장 위에는 구름모양의 옥이 달려 있는데, 밑부분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있고 윗부분에는 2개의 구멍이 뚫려 붉은색의 비단실로 꿰어 있다. 윗부분의 실은 색동 공단의 윗부분에 고정되었고 밑부분의 실에는 옥구슬이 꿰어져 있다. 그 밑으로는 긴 사각형의 옥판에 구멍을 뚫어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줄에 연결하였고, 첫번째, 다섯번째 줄에는 엽전모양의 옥판을 반으로 갈라 마주보게 꿰어 놓았다. 그 밑으로는 계속 옥구슬이 연결되어 있는데, 첫번째, 다섯번째 줄에는 세로로 긴 사각형의 옥판이 달리고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줄에는 바로 위의 것과 같은 형태의 옥판이 달려있다. 그 밑으로는 다시 옥구슬이 연결되고 마지막에는 각줄마다 하나씩 옥판이 달려있는데, 중심인 네번째 줄에는 제일 윗부분에 있는 구름모양의 옥판과 같은 모양의 것이 달려있다.
패옥의 뒷부분에는 4가지 색으로 짠 소수가 달려있는 4색의 색동공단이 대어져 있다. 색동공단 아래에는 매듭으로 짠 조와 술이 달려 있는데, 이 조와 술도 색동공단과 마찬가지로 4색으로 배열되어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47호   별전 괴불(17족) (別錢 괴불(17足)) 

이 별전괴불은 별전과 괴불 등의 자수 장식품들을 꿰어 만든 열쇄 패이다. 별전은 조선 인조 11년(1633) 상평통보의 소재인 구리의 질과 무게 등을 시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기념화로 당시 왕실이나 사대부들의 패물이나 애장품으로 사용되었다. 괴불은 오래된 연꽃 뿌리에 서식하는 열매로 벽사(벽邪)의 의미를 갖고 있어서 헝겊 등으로 만들어 어린이나 부녀자들이 장식품으로 애용하였다.
이 별전괴불은 궁중에서 사용한 것이라 전하며 그 형태는 용두문 고리에 달린 주머니형의 동판에 별전, 괴불 등 모두 19줄의 장식이 달려 있는데 그중 3줄은 용두문 고리에 달려 있다. 복주머니의 한 면은 백색 바탕 중앙에 청색 해태 한 마리가 칠보되어 있고 해태를 중심으로 적색·황색·청색의 새들과 난초 같은 꽃 한 송이가 시문되어 있다. 바탕에는‘수복강령(壽福康寧)’,‘부귀다남(富貴多男)’이라는 길상문과 형태를 알 수 없는 문양이 시문되어 있는데 이 문양들은 모두 적색·청색·녹색 칠보로 되어있다. 주머니뒷면은 청색 바탕에 적색 몸통과 녹색 날개를 그린 박쥐 다섯 마리가 칠보기법으로 동판에 음각되었으며 중심부에는 황색 원형 속에 적색의‘수(壽)’자 문양이 칠보장식 되어 있다. 용두문 고리에 연결되어 있는 윗부분은 청홍의 칠보를 한 동물의 얼굴형을 하고있다.
이 복주머니 동판에 16줄의 장식품이 달려 있는데 그 중 7줄의 별전이 황색·적색·연두색의 긴 사각형의 비단 천에 꿰어져 있다. 6줄은 원형의 별전이 9개씩, 1줄은 꽃 모양의 별전 5개와 원형 별전 2개가 꿰어져 있다. 한 줄의 길이는 대략 20~35㎝ 정도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48호   동궁비 원삼 (東宮妃 圓衫) 

원삼이란 황후와 왕비, 빈들이 입었던 예복을 말하는데, 이 유물은 조선후기 세자의 비가 대례복으로 입었던 옷이다. 길이는 약 145㎝, 소매길이 135㎝이며 소매통은 68㎝이다.
넓고 긴 소매에 푸른색과 노란색의 색동을 대고 그 끝에는 흰색의 한삼을 대었다. 길과 소매의 위, 소매 아래가 금실로 짜여 있으며 구름과 봉황무늬가 들어가 있다. 색동과 한삼은 전체가 금실을 넣어 짠 직금단으로 되어있다. 원삼의 양어깨와 가슴 중앙에는 홍색단에 금실로 용을 수놓은 보(補)가 달려있다. 앞은 마주 여미게 되어있고 안에는 동정이 달려있다. 대는 남색으로 모란문이 금박되어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두 줄의 금박선으로 마감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49호   전 황후 황원삼 (傳 皇后 黃圓衫) 

 

궁중에서 큰 예식이나 혼례식에 입었던 왕비의 원삼이다. 원삼이란 황후와 왕비, 빈들이 입었던 예복이다. 이 원삼은 황색의 금직단에 붉은색으로 안을 넣고 그 둘레를 남색으로 선을 둘렀다.
소매 끝에는 다홍색과 남색의 색동과 금직단으로 만든 한삼을 달았다. 황색의 금직단에는 ‘백수(百壽) ’, ‘백복(百福) ’, ‘다남(多男) ’등의 글씨무늬가 있는데 소매와 길의 위아래에도 같은 문양이 금실로 짜여져 있다. 황후의 표식으로 가슴에 흉배를 달고 양쪽 어깨에도 보를 달았는데, 이것은 원삼의 바탕색과 같은 노랑색 바탕의 둥근 원으로 만들어져 있다. 안에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금실로 수놓고 둘레는 오색의 구름을 수 놓았다.
보통 왕비의 색은 홍색인데, 원삼이 황색으로 되어있는 것은 고종 33년(1897) 대한제국 선포후 왕이 황제로 승격됨에 따라 왕비를 황후라 하고 원삼도 황후의 황색을 착용하게 되었다. 전 황후 황원삼은 대례복으로 전해오는 유물들 가운데 우리나라에 소장된 것으로는 유일한 예로써 그 가치가 높다.

국가민속문화재 제50호   옥색 명주 장옷 (玉色 明紬 장옷) 

장옷이란 여인들이 외출을 할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착용하던 두루마기와 비슷한 포(袍)의 일종으로 장의(長衣)라고도 함다. 겨울철에는 방한을 목적으로 솜을 두어 입기도 했으며 다른 포에 비교해서 비교적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기도 했다.
옥색 명주로 만든 이 장옷은 소매끝에 흰색천으로 덧댄 거들치가 달려 있고 동정 대신에 엷은 흰색의 헝겊을 대어 착용할 경우 이마 위 정수리에 닿도록 하였다. 앞단추가 달려있어 여밀수 있으며 여기에 이중으로 고름을 달아 양쪽에서 손으로 잡아 매도록 하였다. 가장자리에는 가느다란 선이 둘러져 있고 깃은 쌍깃이며 겉감은 옥색이고 안감은 흰색이다. 앞자락은 4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겉섶과 길 사이에는 장옷의 폭을 넓게 하기 위하여 무가 달려있고 소매가 길까지 깊이 들어와 달려있다. 겨드랑이 밑에는 바이어스로 처리된 보라색의 삼각무가 있고 보라색의 고름이 달려 있다.
뒷면을 살펴보면 등솔이 없는 것이 이 장옷의 특징으로 이러한 장옷은 치마형으로 만들어 사용했던 쓰개치마와 같이 당시 여인들이 외출할 때 꼭 필요한 것으로서 대한제국 말까지 사용하였다.

국가민속문화재 제51호   청색 숙고사 장옷 (靑色 熟庫紗 장옷) 

장옷이란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나들이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사용하던 쓰개의 일종이다. 이 장옷은 옥색 명주 장옷과 유사한 쓰개전용으로 만들어진 옷이다. 겉감은 청색 숙고사(여름용 비단)이며 여기에 수(壽)자와 희(囍)자, 운(雲)자를 새겼다. 깃과 고름, 그리고 겨드랑이 밑에 달린 삼각무는 자주색이다. 옷섶은 2개가 달린 쌍섶이며 고름은 섶과 깃의 경계에 하나 붙어있고, 섶의 중간 쯤에 또 하나가 붙어있어 2개의 고름이 달렸는데, 고름 역시 자주색이다. 장옷의 가장자리는 0.3㎝정도의 검은 선을 둘렀으며, 소매 끝에는 길이 27㎝의 한삼이 달려있다. 깃은 목판 깃이다. 뒷길부분의 아래쪽과 고름에 옷감을 제직한 공장의 이름<별품사(別品紗)>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이 장옷은 중요민속문화재 제50호인 옥색명주장옷과 같은 형태로 구성법도 동일하다. 안감과 겉감을 따로 완성한 후 안감과 겉감을 부착한 형태이다.
※ 지정 명칭 변경 : 국가민속문화재 명칭변경계획에 따라 「희운문단장옷」에서 「청색 숙고사 장옷」으로 명칭 변경되었다. (2005. 2. 18)

국가민속문화재 제52호   광화당 원삼 (光華堂 圓衫) 

조선후기 고종(재위 1863∼1907)의 후궁 광화당 이씨가 입었던 원삼이다. 원삼(圓衫)이란 궁중의 왕비와 후궁의 예복으로 기본적인 구성은 황원삼이나 홍원삼과 동일하지만 후궁용 원삼의 두줄 직금색동을 제외하면 금직이나 금박의 장식을 볼 수 없어 신분적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옷의 겉감은 자주색이고 안감은 홍색의 단에 남색 선을 둘렀으며, 소매 끝에는 남색과 황색의 색동을 대고 백색의 한삼을 대었다. 옷감의 무늬는 호리병수문, 만(卍)자가 들어있는 표주박문, 희(囍)문 등이 들어가 있다. 대(帶)는 홍색의 감에 구름과 봉황무늬의 금박이 찍혀 있으며, 앞여밈은 서로 마주 보고 여미게 되어있다. 금색의 사각 단추가 깃 바로 아래에 달려있다.
궁중의 법도에는 황후는 노란색의 원삼을 입었고 왕비는 붉은색의 원삼을 입었으며, 빈들은 자주색의 원삼을 입었다고 한다. 공주는 초록색의 원삼을 입었으며 서민가에서는 결혼식의 예복으로만 입었다. 특히 왕비나 후궁이 착용할 때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금실로 수놓고 원형의 보를 장식하는 등 화려함을 더하게 하였다. 광화당은 고종의 후궁이었으나 이 자색 원삼은 금실로 짜지도 않았고 금박도 찍혀있지 않아 다른 원삼에 비하여 화려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품계를 나타내기 위한 흉배(胸背)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보(補)도 사용하지 않은 소박한 상태의 원삼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53호   토황색 명주 저고리 (土黃色 明紬 저고리) 

조선중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명주저고리이다. 저고리의 길이가 21㎝ 정도로 짧고, 소매의 배래가 직선으로 좁은 형태를 이룬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저고리의 겉감은 황토색의 고운 명주이며 깃은 짙은 갈색이다. 안감 역시 황토색의 고운 명주이다. 겉 깃은 각이 진 목판깃 형태이며, 앞은 당코와 같이 곡선으로 만들어졌다. 한 점은 저고리의 깃이 갈색으로 대어져 있고 길은 토황색이다. 다른 한 점은 회장과 끝동, 깃을 갈색으로 대어 만든 점이 다르다.
2점의 명주저고리는 그 형태와 치수가 비슷하고 전체적인 모양이 청연군주의 저고리와 비슷하다. 청연군주는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1녀로 영조 30년 태어나 순조 21년 사이에 생존했던 인물이다. 토황생명주저고리 2점은 무덤 안에서 출토된 것으로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수의로 사용된 것이며, 조선중기 저고리 변천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54호   황후 적의 (皇后 翟衣) 

적의란 왕비나 왕세자비가 종묘와 사직에 참배할 때나 신하들에게 아침문안을 받을 때 갖추어 입던 대례복으로 친애(親愛), 해로(偕老)를 의미하는 꿩(翟) 무늬를 수놓은 두루마기와 비슷한 조선시대 최고신분의 여성복식이었다. 이 유물은 고종이 황제에 오른 후 황후가 입었던 적의로 보인다.
이 옷은 남색 바탕에 154쌍의 꿩을 그린 적문(翟紋)이 위에서 아랫단까지 12단으로 나뉘어 들어있는 금직단으로 만들었다. 입부리를 마주 닿게 바라보고 있는 한쌍의 적문과 적문사이에는 꽃잎이 5개인 꽃이 돌아가며 배치되어 있다. 꿩의 문양을 녹색, 붉은색과 검은색의 실로 수놓았다. 깃에서부터 앞단과 아랫단 전체 둘레와 소매 끝의 넓은 수구에는 구름과 용의 무늬가 금직이 들어있는 붉은색의 단으로 둘러져 있다. 앞뒤의 흉배와 양어깨에 있는 보(補)에는 구름과 용의 무늬를 금실로 수놓았다. 이 옷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적의로 복식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국가민속문화재 제55호   황후 청석 (皇后 靑舃) 

청석이란 왕비가 대례복인 푸른색의 적의를 입을 때 함께 신었던 신발이다. 조선의 역대 왕비들의 적의는 모두 붉은색이였으나 고종때 대한제국(1897)으로 국호를 바꾼 후에 황후의 대례복을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바꾸면서 만들어진 신발이다.
이 청석의 겉감은 푸른색 비단이며 안감은 백색 명주인데 속에 심을 빳빳하게 대어 신발의 모양을 팽팽하게 유지하였다. 신발의 콧날에는 보라색 실로 촘촘히 수놓고 보라색의 술장식을 달았으며 앞코 밑에는 구름무늬를 역시 보라색 실로 곱게 수놓았다. 또한 신이 벗겨지지 않도록 신발을 신은 뒤 맬 수 있게 길고 큰 끈을 달았는데 이 끈이 빠지지 않도록 신의 양옆과 뒤에는 백색 공단으로 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신발의 바닥은 두꺼운 무명천에 빳빳한 심을 넣어 견고하게 붙여 마치 징을 박은 듯 하며 푸른색 비단과 바닥을 흰색실로 박음질하여 단단하게 연결시켰다. 현재 신발 코에 달린 보라색 술은 한쪽은 떨어져나가 없어졌고 한쪽 신에만 남아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56호   수복칠보석류문 황갈단 당의 (壽福七寶石榴紋 黃褐緞 唐衣) 

조선중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당의이다. 당의란 조선시대 궁중과 사대부 여인들이 저고리 위에 덧 입었던 예복으로 모양은 저고리와 비슷하지만 앞과 뒤의 길이가 길고 겨드랑이부터 아래로 트여있는 옷이다.
이 당의는 출토유물로 옷의 안과 밖이 모두 황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어 본래의 색을 알 수 없다. 황갈색 바탕에 수(壽)와 복(福)자 그리고 칠보석(七寶石), 석류나무(榴) 등의 무늬가 섞여져 있는데 특히 금실로 수놓은 수와 복자는 다른 무늬보다 두드러져 보인다. 깃은 너비가 넓고 깃머리가 뾰족하게 각이 져 있으며 소매는 어깨부터 소매끝까지 곡선이 없는 직선배래로 소매끝에는너비가 7㎝정도의 한삼이 달려 있다. 허리부분까지 원만하게 휘어져 곡선을 이루다가 밑으로 퍼졌고 양옆은 완전히 트여져 있다. 이 당의는 앞쪽이 2폭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 점이 이 옷의 특징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57호   수복칠보석류보상화문 황갈단 당의 (壽福七寶石榴寶相花紋 黃褐緞 唐衣) 

황갈색 바탕에 수(壽)와 복(福)그리고 칠보석(七寶石), 석류(榴), 꽃 등의 문양이 섞여있는 조선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당의이다. 당의란 조선시대 궁중과 사대부의 여인들이 저고리 위에 덧입던 예복으로 모양은 저고리와 비슷하나 앞과 뒤의 길이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고 옆이 터져 있는 옷이다.
이 당의는 두벌 당의로 구성된 당의이다. 당의의 겉과 안쪽은 모두 황갈색이며 수(壽)와 복(福)자 그리고 칠보석류, 석류(榴)의 문양뿐만 아니라 만(卍)자가 섞여 있고 안쪽에는 구름무늬가 있다. 깃은 뾰족한 당코깃이며 소매는 어깨부분인 진동부터 소매부리까지 약간 좁아진 직선배래이다. 안 옷고름은 짙은 자주색이나 겉옷 고름은 떨어져 없어졌다.
소매와 길의 위와 아래에 있는 수복(壽福)자는 옷 전체에 있는 수복(壽福)자와 똑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지만 이 부분만 특별히 금실로 수놓아 화려해 보인다. 또한 문양에 보이는 만(卍)자는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의 상류층에 여전히 불교적 영향이 남아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58호   곤룡포 부 용문보 (袞龍袍 付 龍紋補) 

곤룡포는 임금이 평상시 업무를 볼때 입었던 집무복으로 가슴과 등, 양어깨에 용의 무늬를 금실로 수놓은 둥근 보(補)가 달려 있어 용포 또는 망포라고도 불렀다. 세종 26년(1444) 중국 명나라에서 처음 들여와 입기 시작했으며 명이 망한 뒤에 비로소 우리의 자주성을 보이며 우리 풍속에 동화되었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붉은색에서 중국의 황제와 같은 황색의 곤룡포를 입게 되었는데 여기 2벌의 곤룡포는 황색으로 고종이 입었던 것이다.
한 벌은 소매가 넓은 활수포이고 다른 한 벌은 소매가 좁은 착수포이다. 그 중 활수포의 겉감은 구름과 보석무늬가 있는 황색이고 목둘레의 깃은 둥근 단령이며 안감은 붉은색으로 깃모양은 직각으로 각이 진 직령으로 마치 속옷처럼 보인다. 깃부분은 따로 따로 바느질이 되었으나 그 밑으로는 안팎의 솔기가 함께 꿰매져있다. 옷에 부착되어 있는 둥근 모양의 보에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금실로 수놓았는데 가슴 앞과 오른쪽 어깨에는 해를 상징하는 빨간 여의주를, 등 뒤와 왼쪽 어깨에는 달을 상징하는 흰색의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등뒤에 있는 용은 몸을 둥글게 틀고 있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있다. 이와 같이 한 벌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두 가지 내용을 가슴의 앞과 뒤, 어깨의 왼쪽과 오른쪽에 표현하여 4개가 한 쌍을 이루게 한 예는 매우 드문 희귀한 경우이다.
두 벌의 곤룡포는 소매의 좁고 넓은 점을 제외하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고종 32년(1895) 문무관의 예복을 간소화 할 것을 명하면서 고종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소매가 좁은 곤룡포를 만들어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 유품은 고종이 대한제국말에 직접 착용한 것으로 궁중의 바느질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복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59호   십장생수 이층롱 (十長生繡 二層籠) 

십장생수이층농(十長生繡二層籠)은 농의 앞면에 십장생 등의 문양이 자수로 놓여진 홍색의 전(氈)을 붙인 이층농이다. 오동나무로 만든 너비 77㎝, 높이 138.5㎝의 2층 장농으로 앞면에는 여러 가지 문양을 수놓은 붉은색 전(氈)을 붙였고 장롱의 네귀퉁이와 이음쇠, 문고리 등은 놋쇠로 만들어 장식하였다.
위층과 아래층에는 같은 문양을 배치하고 장롱의 상단부에는 오동나무를 테로 하여 덩굴무늬를 수놓은 붉은 색의 전을 붙였으며 그 아래 문짝에도 오동나무를 테로 삼아 亞자무늬 안에 구름과 물결무늬 등을 곁들인 십장생을 수놓은 붉은색 전을 붙였다. 하단부 역시 오동나무를 테로 삼아 구름무늬와 물결무늬 등을 곁들인 연꽃무늬를 수놓은 붉은 색 전을 붙였다. 자수는 황색과 녹색,청색의 꼰사를 사용하여 수 넣았다. 장롱 밑에는 상같이 생긴 얕은 받침대가 있어 네귀퉁이에 놋쇠장식을 하였으며 장롱을 옮기기 편하게 양쪽에 놋쇠로 손잡이를 달았다.
오동나무 장롱은 자개장이나 화류장과 같이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조촐하고 단아하여 귀하게 여기던 장롱이었다. 여기에 자수를 곁들여 십장생문 등 우리 조상이 즐겨 사용하던 문양을 예쁘게 전에 수놓아 이를 짜임새 있게 붙여 놓은 점이 돋보이며, 18∼1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민속문화재 제60호   초충수병(4폭) (草蟲繡屛(4幅)) 

병풍은 전체 6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 4폭은 신사임당의 자수 작품이고, 양끝의 2폭은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의 제찬(題讚)이 있는 그림이다.
병풍 한폭의 크기는 가로 44.5㎝, 세로 152㎝로 1폭은 바위에 국화를 그린 묵화이며, 2폭은 나무와 나리를 수놓고 나비가 날고 있는 모습을 색을 입혀 그렸다. 3폭은 나무와 꽃이 핀 모란을 수놓았으며 그 위를 나비가 날고 있다. 제 4폭은 나무와 꽃이 핀 철쭉을 수놓고 그 위를 날고 있는 나비를 그렸다. 5폭은 나무와 꽃이 핀 국화를 수 놓고 벌이 날고 있는 모습을 색채화로 그렸으며, 6폭은 바위와 나무와 대나무를 그린 묵화이다. 그림의 하단에는 화가인 허백련이 쓴 칭찬글이 실려 있다. 자수는 흰색 명주바탕에 미색, 노란색, 푸른색, 자주색, 밤색 등의 꼰실을 써서 만들었는데, 자수의 최고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신사임당은 산수와 포도, 풀과 벌레를 잘 그렸다고 하며 자수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초충도는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진「초충도」(동아대학교 소장)와「사계분경도」(허동화 소장)와 수법이 일치하여 신사임당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무리가 없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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