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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민속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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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   남이흥장군 일가 유품 (南以興將軍 一家 遺品) 

남이흥(1576∼1627)은 임진왜란 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전사한 남유의 아들로, 선조 35년(1602)에 무과에 급제 하고, 이후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1차 지정 유물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었던 사슴가죽으로 만든 옷 1벌과 인조 임금이 하사하였다고 전하는 곤룡포 1점, 그리고 상아·나무·녹각 등으로 만든 장군과 가족들의 호패 7점이다. 2004년에는 고문서 13점, 영정1점, 생활자료 10점, 복식 6점 등 총 30점의 유물을 추가로 지정하였다. 이 외에도 고서(古書), 서한(書翰), 영정, 교지 등 500여 점의 유품들은 17세기 초의 생활상과 복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2004. 9. 25. 지정명칭 변경 : '남이흥장군유품'에서 '남이흥장군일가유품'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4년 2월 관계 전문가 추가지정조사 실시 결과 지정명칭 변경과 고문서 13점, 영정1점, 생활자료 10점, 복식 6점 등 총 30점의 세부유물을 추가 지정하였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2호   윤증가의 유품 (尹拯家의 遺品) 

명재(明齋) 윤증은 성리학과 예학에 밝고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어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충남 논산군 이산에 머물며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매진했던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이다.
윤증가의 유품은 조선 후기의 학자인 윤증(1629∼1714)이 사용했던 물건들과 문중에 전해 내려오는 유물로, 상투관, 빗, 빗치개, 살쩍밀이, 신, 백목화, 합죽선, 월자, 첩지, 비녀, 인장, 혼천의, 해시계 등의 생활자료와 회화류, 겨울철 여성의 방한모인 아얌 등 복식류가 있다.
복식류를 비롯한 각종 생활자료는 윤증과 그의 후손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당시 양반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중 혼천의(渾天儀)와 해시계는 우리나라 초기 천문과학 형성과정과 당시 유학자들의 우주관을 보여준다. 이밖에 명재선생유상 등을 비롯한 영정 및 관련 자료들은 '영당기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제작시기나 제작에 참여한 여러 화가들을 확인할 수 있다.
※ 2004년 2월 관계 전문가의 추가지정 조사 실시 결과 복식류(아얌 1점), 인장·벼루 등 생활자료(32점), 회화류(14점)를 추가 지정하였다. (추가 지정일자 : 2004.9.25)
※ 추가 지정되었던 회화류(14점) 중 윤증 초상(3점)과 영당기적(1점)은 보물(제1495호 윤증 초상 일괄, 2006.12.29.지정)로 지정되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3호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慶州 良洞마을 松簷宗宅) 

 

경주 손씨 큰 종가로 이 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집이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1491∼1553)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一자형 대문채 안에 ㅁ자형 안채가 있고, 사랑채 뒷쪽 높은 곳에 신문(神門)과 사당이 있다.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사랑방과 침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ㄱ'자형으로 놓여 있는 사랑채 뒷편 정원에는 수백년 묵은 향나무가 있다. 대개 사랑방은 큰 사랑방 대청 건너편에 작은 사랑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집은 작은 사랑을 모서리 한쪽으로 두어 방과 방이 마주하지 않도록 한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일종의 마루통로 형식으로 꾸민 점 역시 특이하다.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랑채 뒷편 정원의 경치 역시 뛰어난데,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하여 조선 전기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월성손동만씨가옥(月城孫東滿氏家屋)'이었으나, 사랑 대청에 걸린 편액인 '서백당(書百堂)'을 따서 '양동 서백당'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서백당(書百堂)은 참을 인(忍)' 자를 100번 쓴다는 의미이다.
이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4호   영천 매산고택과 산수정 (永川 梅山古宅과 山水亭) 

풍수지리학상 좋은 터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집은 '매산 정중기'(1685∼1757) 선생이 짓기 시작하여 둘째 아들 '정일찬'이 완성하였다고 한다. 대문채·안채·사랑채·사당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전형적인 'ㅁ'자 평면을 가진 안채가 있다. 사랑채 누마루는 사랑방과 직각을 이루면서 덧붙어 있다.
대문채는 3칸 규모로 양쪽으로 긴 담장이 있고 안채 가운데로 대청을 두었다. 대청 왼쪽으로는 큰방과 부엌을 두었는데, 이와 같은 형식은 영남지방의 구성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사랑채의 독립된 건물인 산수정은 동쪽 사랑방과 이어져 있는데 지붕을 얹은 수법이 지붕 옆면을 건물의 앞면으로 사용하여 특이한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사랑채는 본채 오른편에 따로 담장을 둘러 구성하고 있다.
집터를 잘 활용하여 지은 전통있는 조선시대 가옥으로 지리·건축·민속의 여러 측면에서 귀한 연구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당시 명칭은 '영천정재영씨가옥및산수정(永川鄭在永氏家屋및山水亭)'이었으나, 가옥을 지은 정중기의 호를 따라 ‘영천 매산 고택 및 산수정’으로 명칭 변경(2007.1.29)하였다.
이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6호   정읍 김명관 고택 (井邑 金命寬 古宅) 

김동수의 6대 할아버지인 김명관이 조선 정조 8년(1784)에 세운 집이다. 뒷쪽으로 창하산이 있고 앞쪽에는 동진강 상류가 흐르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풍수지리에서 명당이라 말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이루고 있다.
건물들은 행랑채·사랑채·안행랑채·안채·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과 바깥행랑채가 있고 바깥행랑의 동남쪽에 있는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문간채가 있다. 사랑채 서쪽으로 'ㄷ'자형의 안행랑채를 배치하였는데 그 앞쪽으로 'ㄷ'자 평면을 가진 안채가 있다. 안채는 좌우 대칭을 이루게 지어 좌우 돌출된 부분에 부엌을 배치하고 있는 특이한 평면을 갖추고 있다. 안채의 서남쪽에 있는 안사랑채는 김명관이 본채를 지을 때 일꾼들이 기거했던 곳이라고 한다.
소박한 구조와 건축가의 독창성, 조선후기 사대부 가옥의 중후한 모습을 대체로 원형대로 잘 유지하고 있어 건축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좋은 연구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 최부자댁 (慶州 崔富者宅) 

경주 최씨의 종가로 신라시대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전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9대째 대대로 살고 있으며 1700년경 이 가옥을 지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건물 구성은 사랑채·안채·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대문채에는 작은 방과 큰 곳간을 마련하였다. 사랑채는 안마당 맞은편에 있었으나 별당과 함께 1970년 11월 화재로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사랑채터 뒷쪽에 있는 안채는 트인 'ㅁ'자형이나 실제로는 몸채가 'ㄷ'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고 'ㄱ'자형 사랑채와 '一'자형 중문채가 어울려 있었다. 또한 안채의 서북쪽으로 별도로 마련한 가묘(家廟)가 있는데 남쪽으로 난 반듯한 길이 인상적이다. 안채 뒷편으로 꽃밭이 있어 집 구성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대체로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최식씨가옥(慶州崔植氏家屋)이었으나, 경주 최씨가문이 대대로 살아왔던 집이고, 경주의 이름난 부호로 '교동 최부자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경주교동 최씨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 하였다.
이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8호   인왕산 국사당 (仁旺山 國師堂)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국사당은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여러 신을 모신 당집으로 요란한 굿판을 벌이기 쉽도록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세운 ‘굿당’에 속한다.
원래 남산 꼭대기에 있었던 것을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전을 강요하자 건물을 해제하여 현재의 인왕산 기슭에 옮겨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인왕산을 택한 이유는 이곳이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에 속하고 현재 무속신으로 모셔지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양끝의 2칸은 이곳으로 이전한 후 새로 지은 것이다. 1칸은 4쪽의 여닫이문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내부의 3면에는 무신도가 걸려있고 마루에는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 건물보다 구조는 간단한 편이나 그 규모는 더 크다.
1925년경에 새로 지어진 국사당은 영·정조때의 건축기법을 바탕으로 한 원래의 국사당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내부의 대들보가 아치형으로 된 것이 특이한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목재의 짜임새가 튼튼한 것이 목공의 솜씨가 돋보인다. 인왕산 국사당은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하고 많은 무신도를 볼 수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9호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 (泗溟大師의 金襴袈裟와 長衫) 

사명대사(1544~1610)는 임진왜란 때 의병과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 유물은 사명대사가 착용했던 가사와 장삼이다. 가사는 승려들이 입던 법의(法衣)로 장삼을 입고 그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덧 옷이다. 장삼은 검은색이나 흰색으로 만든 길이가 길고 소매가 넓은 옷으로 가사와 함께 승려가 입는 법복 중 하나이다. 사명대사 금란가사는 황금색의 중국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현재는 담황색으로 변색되고 훼손도 심하여 본래의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흰색 무명으로 만든 사명대사 장삼은 상의와 하의가 연결되어 있으며, 군데 군데 훼손은 되었으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사명대사 금란가사와 장삼은 착용자를 알 수 있는 유물로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승려들의 복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0-1호   보부상 유품(1) (褓負商 遺品(1)) 

조선시대 저산8구 상무좌사 보부상이 사용했던 유품이다. 저산8구(苧産八區)란 모시가 많이 생산되던 부여 · 홍산 · 남포 · 비인 · 한산 · 서천 · 임천 · 정산 등의 8읍을 말하고, 상무좌사(商務左社)란 등짐장수로만 이루어진 조직을 가리킨다. 이 조직에는 최고 고문인 영위가 있고 그 다음으로 반수가 있었으며 그 아래로 실무를 담당하는 장무원이 있었다.
상무좌사 보부상 유품으로는 이들이 사용하던 도장 4개, 보부상의 증명서인 신표 2매, 물미장(촉작대)과 패랭이가 있다. 특히 물미장(촉작대)과 패랭이는 보부상 단체의 상징이 되는 유물이다. 물미장은 등짐장수의 지게를 버티는 끝에 촉(물미)을 박은 작대기로서, 조선 태조가 하사하였다는 물미장을 본 떠 만든 후, 8각으로 용의 문양을 조각해 놓아 ‘용장’이라고도 한다. 패랭이는 평소에 보부상이 쓰고 다니는 모자로서, 특히 매년 음력 2월에 열리던 보부상 명절인 총회 때에는 모자의 양쪽에 솜방망이를 달아 장식하였다. 이밖에 총회 때 사용되던 청사초롱과 『비변사완문』을 비롯한 전적류가 약간 남아 있다.
이 유물들은 한말 보부상의 역사와 조직 및 그 기능과 상업활동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0-2호   보부상 유품(2) (褓負商 遺品(2)) 

충청남도 예산과 덕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덕상무사’의 유품으로, 인장 6개, 인궤 1개, 청사초롱 2개, 공문 16점 등이 있다. 이 유품들은 예덕상무사 보부상의 조직과 기능을 설명해 주는 귀중한 민속자료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0-3호   보부상 유품(3) (褓負商 遺品(3)) 

조선시대 저산 8구상무우사의 보부상 유품이다. 저산8구란 모시가 많이 나는 부여 · 홍산 · 남포 · 비인 · 한산 · 서천 · 임천 · 정산 등 8읍을 말하는데,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상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유품으로는 우사조직의 고문격인 영위의 도장과 실무자가 사용한 도장 및 도장을 넣어두던 상자가 있다. 이 밖에 깃발 2매, 각 읍의 군수나 현감이 상무우사의 좌상이나 회원 집사 등을 임명하는 차정서 25건, 진영의 장이나 관찰사에게 올린 소지 43건, 행정기관에서 받은 전령 등이 남아 있다.
각종 상무사 관계 서류인 전적도 18종 남아있는데, 이들 문서는 특히 지방 관청과 보부상 단체와의 관계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0-4호   보부상 유품(4) (褓負商 遺品(4)) 

조선후기 이후 보부상이 사용하던 유물 중 1992년에 지정된 ‘원홍주육군상무사’의 유품이다. 서해안 쪽의 홍성 ∙ 광천 ∙ 보령 ∙ 청양 ∙ 대흥(大興) ∙ 결성 등 6군 중심의 상권을 관할해온 원홍주육군상무사는 장시를 운영하는 임소(任所)와 임소를 총괄하는 본소(本所)로 구성되어 있었다.
원홍주등육군상무사단제비(元洪州等六郡商務社壇祭碑) 등 5기의 비석류(碑石類)는 보부상들의 제사 관행을 엿볼 수 있다. 이중단제비(壇祭碑)는 보부상들의 공동묘소인 홍도원에서 한식제사를 지낼 때 제일 먼저 제사 지내는 비로 보부상 중에 분묘가 실전된 지사(志士)를 모시는 단이라고 한다. 이들의 한식 의례는 전날 상무사 초대접장인 임인손(林仁孫) 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당일 단제비를 시작으로 허반수 등 6기의 묘소를 들른 다음 합동위령비로 간다. 홍도원의 공동묘지는 별다른 연고 없이 떠돌아다니던 보부상들에게는 사후 안식처이자 이들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가 되었다.
1887년에 작성된『상리국서(商理局序)』는 혜상공국을 상리국으로 바꾸면서 당시의 서문과 전교(傳敎), 계문(啓文) 등을 적어 보부상조직의 변화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일제가 한반도 식민화계획을 노골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 등의 자료도 있고 그와 관련하여 일제가 충남에서 상업주식합자회사를 만들어 공주읍에 회사를 두고 자본침투를 기하려는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자료도 있다. 이러한 유물과 각종 문서들은한말 상무사의 기능과 활약상을 알아보는데 단서를 제공하는 귀중한 민속자료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0-5호   보부상 유품(5) (褓負商 遺品(5)) 

고령상무사는 경북 고령장을 중심으로 하여 인근 상권을 장악했던 조선 보부상단 지부를 일컫는 이름이다. 좌사계(左社契)는 매년 음력 정월에 총회를 열고 임기 1년의 새로운 반수와 접장을 선출한 뒤, 이미 세상을 떠난 역대 반수와 접장 140명의 위패를 모신 가운데 제상을 마련 대제를 지냈다. 선배 보부상의 유덕을 기리며 인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지신밟기 등 농악놀이로 축제를 벌였다.
이 지역은 낙동강 유역과 근접된 곳으로 배편을 이용하여 소금, 생선 등의 물자가 교역되었다. 또한 토질이 자기(磁器) 생산의 최적지로 알려져 물량이 많이 생산되었다. 이들 물품을 조직적으로 유통시킨 집단이 고령상무사다.
반수접장명단(班首接長名單)은 우사상계(右社商契)의 반수(班首)접장(接長)을 역임했던 사람들의 명단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0-6호   보부상 유품(6) (褓負商 遺品(6)) 

창녕상무사란 경남 창녕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조선보부상단 지부를 일컫는 이름이 다. 창녕은 멸포나루 ∙ 이이목나루 ∙ 반포나루 ∙ 술터나루 ∙ 우산나루 등의 여러 나루와 또한 각지의 육로(陸路)를 통하여, 김해 ∙ 부산 ∙ 고령 ∙ 상주 ∙ 인동 ∙ 산청 ∙ 합천 ∙ 거창 등의 물산이 집하되는 요지였다. 창녕장은 매우 번성하였고, 이는 창녕상무사가 조직되는 배경이 되었다. 창녕상무사에서는 부상(負商)은 행상에주력하고 우상(右商)은 일정한 장소에서 점포를 정하고 상품을 판매하였다.
창녕지역에서는 좌우, 우사가 구분되었다가 한때 합위(合位)가 이루어져 조직이 강화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이곳에서 상품거래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좌우사의 거래상품 물종이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대동상무국장정(大同商務局章程) 책 말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하여 보면 좌우사의 역할이 엄격히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1호   남은들 상여 (남은들 喪輿) 

남은들 상여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했던 상여로 행상, 영여, 온량거라고도 한다. 남은들 마을입구의 상여막에 보관되어 있는데 보통의 상여막에서 처럼 상여를 해체하여 보관하지 않고 조립된 그대로 관람하기 좋게 전시되어 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음)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넓은 천을 펼쳤다. 몸체에는 봉황, 용무늬 등이 새겨지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데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덜어주려는 의미인 듯 싶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남연군은 순조 22년(1822)에 죽었는데 당시의 가야사 터(현재, 예산군 상가리에 있는 보덕사터)가 왕손을 낳게 하는 명당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흥선대원군이 헌종 6년(1840)에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의 묘를 이장했다고 한다. 이장을 하고 난 그 다음 해에 둘째 아들 이재황(李載晃)-후일, 고종으로 즉위함-을 낳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상여의 제작은 1840년과 고종의 탄생년인 1852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상여는 그 자체의 가치보다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상여라는 점에서 유물로서 가치가 있으며, 각 부의 조각수법도 당시의 조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다른 상여에 비하여 어느 정도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 또한 대원군이 권세를 누리기 전에 제작된 것으로,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에 비해 소박한 모습이지만 왕실 상여의 제작을 담당하던 ‘귀후서(歸厚署)’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숙종 대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인 대여(大輿)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청풍부원군 상여’와 비교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2호   제주 애월 말방아 (濟州 涯月 말방아) 

제주특별자치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와 신엄리에 있는 말방아 2개이다. 말방아는 농기구의 하나로서,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직경 120㎝ 안팎의 둥근 돌로 웃돌을 세우고 이를 말이나 소가 끌어 돌림으로써 곡식을 찧는 연장이다.
말방아는 제주도에서는 필수적인 농기구로, 개인이 소유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공동으로 제작하고 계를 조직하여 관리 운용하였다. 말방아계의 성립은 생산수단의 단순한 구조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도민의 집단구조와 사회·경제사 및 생활사를 살펴보게 하는 다변성을 지닌 역사적 기구이다. 계는 시설의 유지와 수리를 맡을 뿐 아니라 계원 사이의 경조사를 돕는 역할도 하게 된다.
제주의 말방아는 육지에서 행하는 말방아의 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곡식을 다루는 몇가지 일을 모두 해낸다. 즉 곡식의 이삭을 말방아에 올려놓고 곡식 알을 떨어내는 일, 곡식 알의 껍질을 벗겨 속살만 남도록 찧는 일, 그것을 다시 빻아 가루로 만드는 일 등이다.
발방아는 현대식 도정기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주요 농기구의 하나였으나 지금은 자연 소멸되어 쓰이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원시적이고 소박한 시설이다.
※ 2005.9.23. 연자매는 현재 문화재가 소재하고 있는 지역명칭을 병기하면서, 제주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말(馬) 동력을 이용하는 특징을 살려 '제주애월말방아'로 변경하게 되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3호   삼척 신리 너와집과 민속유물 (三陟 新里 너와집과 民俗遺物) 

삼척 신리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너와집과 이집들에 속한 민속유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너와집'이란 굵은 소나무를 알맞은 크기의 판재로 잘라 기와의 대용으로 지붕에 얹어 만든 집을 말한다. 1970년대초까지 여러 종류의 너와집들이 이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으나, 대부분 개조되어 그 자취를 감추었고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집들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너와집은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등의 산간지역과 을릉도 등에 분포하고 있는데 주로 적설량이 많고,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 심한 지방의 산간지역에서 주로 나타난다.
너와집의 평면은 거의 대부분 밭‘전(田)’자 형식의 겹집으로 되어 있는데, 한 채의 집안에 마루, 안방과 사랑방 등의 여러 방과 정지(부엌), 심지어 마구(외양간)까지 들인 폐쇄적인 평면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는 기후 및 외부적 환경의 대응에 따른 결과로, 각 실을 서로 붙여 건물의 외부 노출을 최소화하고 내부에서 발생한 온기(잠열)를 최대한 가두어 극심한 추위를 견디기 위한 목적이며, 마구를 내부에 둔 것은 맹수로부터 가축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다.
세부적인 내부공간의 구성 특징은 집 중심에 있는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 때에 따라 뒤쪽에 안방, 사랑방, 도장방 등을 두고 정지, 봉당, 마구 등을 배치하였다. 봉당은 주로 대청 앞에 위치하는데 집의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출입문을 들어서면 바로 봉당이 되고 이 봉당을 거쳐 각 방과, 정지, 마구로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봉당은 현대의 주택에서 현관과 같은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실내작업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이외에 너와집의 여러 가지 독특한 점은 지붕의 경우 용마루의 왼쪽과 오른쪽에 작은 삼각형모양 구멍을 내어 집 안의 연기를 밖으로 뿜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형식의 집을 까치구멍집이라고도 하며 경북 북부지방에서도 다수 나타난다. 또한, 안방 혹은 사랑방의 구석에는 불을 피워 난방과 조명을 겸할 수 있는 시설인 ‘코클’과 봉당과 정지 사이의 벽체에는 조명의 목적을 위한 ‘두둥불’ 그리고 정지 한켠에 불씨를 보관하던 시설인 ‘화티’가 있다.
이외에 민속유물로는 곡식을 찧기 위한 용도의 ‘물레방아’ 및 '통방아', '채독'(항아리처럼 싸리로 엮어 만든 저장용구), '김치통'(김치등을 담아두던 나무로 만든 통), '설피'(눈이 쌓였을 때 짚신위에 덧신어 다니기 편리하게 만든 것), '창', '주루막'(새끼 따위로 촘촘히 엮어 멜끈을 달아 물건을 나르는데 씀) 등이 있다.
이 지역의 너와집들은 우리나라 강원도 산간지역의 너와집 유형과 발달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4호   경주 월암종택 (慶州 月菴宗宅) 

조선 선조 25년(1592) 부산첨사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김호가 살았던 집이다. 17세기전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집터는 신라시대 절터였다는 설이 있는데, 주변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석조물이 있고 마당의 우물돌은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선 정면에 안채, 왼쪽에 아래채, 안채 오른쪽 뒤편으로 가묘(家廟)가 배치되어 있다. 원래 사랑채가 동쪽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자리만 남아있다.
안채는 앞면 5칸·옆면 1칸 규모에 왼쪽부터 부엌, 방, 대청, 방으로 단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집을 처리한 기법들은 옛 법식을 따르고 있고 대청 앞에는 문짝을 달았다. 대청에 문짝을 다는 예는 안동지방 북쪽에서 드물고, 경주, 월성 일대에 집중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발견되며, 그 중 에서도 특히, 이집은 오랜 수법을 보이는 예로 주목받고 있다.
아래채는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초가지붕이다. 왼쪽부터 방, 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굴뚝을 부뚜막 한쪽에 설치하여 구성의 특이함을 보이고 있다.
가묘는 따로 담장을 둘러 세운 맞배지붕집으로 안쪽을 모두 터 놓은 통칸으로 만들었다.
가장 오래된 민가 건물 중 하나로 옛 건축 수법과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탑동김헌용고가옥(慶州塔洞金憲容古家屋)'이었으나,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순국한 김호 장군(?~1592)의 고택임을 감안하여 ‘경주 김호장군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이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5호   각궁 (角弓) 

조선시대 고종(재위 1863∼1907)이 사용하던 활이라고 전하며, 당시 활 만드는 장인 장문환이 제작하였다고 한다. 활의 전체길이는 124㎝이고, 오금너비는 3㎝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각궁은 명성이 높고 독특한 자료로 만들었다. 글자 그대로 쇠뿔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한국의 대나무, 물소뿔, 쇠심, 구지뽕나무, 참나무, 화피의 6가지 재료로 구성된다.
이 각궁은 벚나무 껍질로 만든 화피 위에 채색을 하였으며, 시위고리를 거는 새코머리는 가죽으로 감싸서 3가지 색의 천으로 발랐고 그 밑에는 아(亞)자 무늬를 새긴 검정색 종이로 감쌌다. 특히 이 활의 검은색 양 단에 각각 ‘호미(虎尾)’ 및 ‘주연(珠淵)’이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어 특색을 이루고 있는데, ‘주연’이 고종황제의 호이므로 고종의 활이라는 내력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는 활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각궁이 언제부터 널리 보급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함흥 선원전에 태조 이성계의 유물로서 이 각궁이 보관되어 있었고, 또 『경국대전』에 각궁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미 각궁의 꾸밈새가 정형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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