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문화재 제101호~1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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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국가무형문화재 제101호~140호

 

국가무형문화재 제101호~140호

국가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金屬活字匠)

금속활자장은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서 각종 서적을 인쇄하는 장인을 말한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고려시대에 창안되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고종 19년(1232) 강화도에 천도한 고려 조정이 개경의 서적점(書籍店)에서 찍은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다시 새겨낸 것이 전하며, 국가전례서인 『상정예문(詳定禮文)』을 금속활자로 찍은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이전에 금속활자 인쇄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관서를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개량·발전시켰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주조기법으로 제작된다. 금속활자의 제작과정은 글자본만들기, 원형만들기, 주조작업, 마무리작업 등 크게 4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주조기법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활자 하나하나를 밀랍으로 만드는 밀랍주조기법으로 초기에 주로 쓰인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활자의 원형으로 주물틀을 만든 후 찍는 모래주조기법으로 조선시대 초조갑인자 이후 보편화된 방법이다.
금속활자는 글씨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과학과 기술을 총망라하여 만들어낸 종합예술품으로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전통공예기술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02호     배첩장 (褙貼匠)

배첩이란 글씨나 그림에 종이, 비단 등을 붙여 족자·액자·병풍 등을 만들어서 아름다움은 물론 실용성 및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적인 서화처리법을 가리키며,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말로 오늘날에는 “표구(表具)”라고도 한다. 배첩장은 조선 전기에 회화를 담당하던 국가기관인 도화서 소속으로 궁중의 서화처리를 전담하던 사람을 말한다.
중국 한(漢)대가 기원으로 알려진 배첩은 당(唐)대에 한층 발전하여 정립되었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 고분 벽화의 병풍 그림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전해져 한국 배첩의 기초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첩은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꾸준히 발전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배첩장이라는 전문가가 등장할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배첩의 제작기법과 형태는 액자·병풍·족자·장정 및 고서화 처리의 다섯 가지이다. 액자는 비단 재단 ―그림 초배(初褙)재배(再褙) ―건조·액자틀 준비 ―조립의 작업과정을 거친다. 병풍의 한 폭 처리도 액자와 같다. 족자의 작업과정은 재단·초배·겹배·건조·삼배·건조·축목(軸木)·반달부착으로 이루어진다. 장정(裝幀)은 표지나 속지가 손상된 고서의 처리를 말한다. 고서화(古書畵) 처리는 손상된 고서화를 되살려내는 작업이기에 높은 안목과 세밀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03호     완초장 (莞草匠)

완초장이란 왕골로 기물을 만드는 사람을 말한다. 왕골은 논 또는 습지에서 자라는 1, 2년생 풀로서 키는 60∼200㎝에 이르며 완초, 용수초, 현완, 석룡초라고도 한다. 왕골제품으로는 자리, 돗자리, 방석, 송동이, 합 등이 있다.
왕골이 신라시대에 이미 사용되었음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려때에는 사직신(社稷神)의 신위에 왕골자리를 깔았으며, 왕실에서 주로 사용하였고 중국에 보내는 증여품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매우 귀한 제품으로 궁중이나 상류계층에서 사용하였고, 외국과의 중요한 교역품으로도 쓰였다.
현존하는 왕골제품을 통해 본 제작기법으로는 도구를 이용하는 두 가지 방법과 손으로 엮는 방법이 있다. 도구를 이용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고드랫돌에 맨 두 가닥 실을 자리틀에 걸고 자리알을 두가닥 실로 엮는 노경소직(露經疏織 :날줄이 겉으로 들어나 보이며 성글게 짜여진 기법)의 자리와 방석이 있으며 또 하나는 돗틀에 씨실을 촘촘히 걸어 긴 대바늘에 꿴 자리알을 넣으면서 바디로 눌러 다져서 짜는 은경밀직(隱經密織 :날줄이 겉으로 들어나지 않으면서 촘촘히 짜여진 기법)의 돗방석과 돗자리가 있다. 손으로 엮는 방법으로는 왕골 4날을 반으로 접어 총 8개의 날줄을 정(井)자형으로 엮은 후 두 개의 씨줄을 엮어 만드는 8각, 원형의 방석이 있고, 삼합, 송동이(작은 바구니) 등도 모두 이 기법을 이용하여 만든다.
왕골제품은 역사가 오랜 생활문화유산으로, 한때 단절위기도 있었지만 1970년 이후 그 제작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지금까지의 왕골제품은 깔 것과 용기에 불과하였으나, 염색과 굵기의 조절이 용이하며 특별한 도구 없이도 다양한 기물을 창작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04호     서울 새남굿

서울 새남굿은 사회 상류층이나 부유층에서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고 좋은 세상으로 인도하기 위해 행했던 서울지역의 전통적인 망자천도굿이다. 새남굿은 조선시대에 형성되었다가 17·18세기경에 오늘날의 형태로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새남굿은 안당사경맞이와 새남굿으로 구성된다. 안당사경맞이는 새남굿이 벌어지는 전날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주당물림을 시작으로 부정, 가망천배, 진적, 불사거리, 도당거리, 초가망거리, 본향거리, 조상거리, 상산거리, 별상거리, 신장, 대감거리, 성주거리, 창부거리, 뒷전거리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다음날 아침부터 이어지는 새남굿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굿으로, 여자무당 5명과 잽이 6명이 참여하며, 장구와 북, 대금, 피리 등 삼현육각이 동원된다. 굿은 새남부정, 가망청배, 무당이 시왕(十王)의 신비롭고 훌륭함을 찬양하는 중디밧산, 저승사자를 놀리는 사제삼성거리, 무당이 옛 왕녀의 화려한 옷을 입고 조상이라 섬기는 바리공주의 노래를 부르는 말미, 왕녀복장을 한 무당이 지장보살을 모신 연지당 앞의 저승문을 돌고 문사자(門使者)와 이야기를 나누고 문을 통과하는 도령(밖도령), 무당이 지장보살의 자비를 구하는 영실, 바리공주가 저승의 12대문을 안전하게 통과하려고 애쓰는 도령(안도령) 유족이 무당에게 유교식 제사를 드리는 상식, 죽은 사람의 혼이 무당에게 씌이면 무당이 유족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하는 뒷영실, 무당이 이승다리와 저승다리를 상징하는 무명과 베를 몸으로 찢어 길을 헤쳐주는 베가르기, 저승의 십대왕을 호위하는 신장들에게 망자의 길을 인도하고 보호하는 시왕군거리, 새남굿을 찾아온 제반 신령들에게 모든 정성을 드렸음을 알리고 잡귀잡신도 대접하는 뒷전으로 끝나게 된다.
서울 새남굿은 다른 무속의례에 비하여 굿이 많고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화려하다. 또한 망자와 관련된 무(巫)와 불교·유교사상이 적절하게 혼합되어 있고, 조선시대의 궁중문화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沙器匠) 

도자기는 흙으로 빚은 그릇을 구워내는 방법에 따라 도기(陶器), 자기(瓷器)로 나누어 지는데, 백토 등이 혼합되어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그릇을 사기(자기)라 한다. 사기장이란 사옹원(司饔院)에서 사기를 제작한던 장인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 도자기는 고려시대부터 천하제일의 비색청자로서 그 명성을 떨쳤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기관인 사옹원(司甕院)에서 자기를 제작하였는데, 경기도에 분원을 설치하여 왕실에서 사용하는 자기를 특별히 제작하였다. 조선 후기 관요(정부 관리하에 도자기를 만드는 곳)가 폐쇄되면서 도공들이 문경, 괴산, 단양 등 지방으로 흩어져 민요(민간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곳)가 번창하였다.
사기의 제작과정은 사토를 채굴하는 것부터 구워내는 작업까지이다. 우선 모래흙(사토)을 구한 후 물에 넣어 이물질을 제거하는 수비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이 끝나면 순수 흙으로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물레작업을 한다. 만들어진 그릇을 가마에 넣고 초벌구이와 유약을 바른 뒤 다시 재벌구이를 해서 구워낸다. 전통적인 나무로 만든 발물레를 시계방향으로 회전시키는데, 이러한 물레 돌리는 방법이 한국 도자기 장인들의 기술이다.
사기장은 서민적이면서 활달한 조선분청사기와 단아한 선비의 향을 담고 있는 조선백자와 같이 한국적 정감과 멋을 나타내는 전통공예기술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刻字匠)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긴 목각판을 각자 또는 서각이라 하는데, 인쇄를 목적으로 할 경우에는 목판본이라 한다. 글자를 반대로 새겨 인쇄방식에 따라 인쇄하는 과정도 각자라 하며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각자장 또는 각수라 한다.
각자는 가장 오래된 목판본으로 알려진 신라시대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목각판인『팔만대장경』이 만들어 지는 등 사찰을 중심으로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 기술이 전해져 훈민정음 원본을 비롯한 많은 목판 인쇄물이 간행되었다. 각자장의 기량은 각질의 흔적, 글자체의 균형도, 잘못된 글자나 글자획이 빠진 것 등으로 가늠한다. 잘못 새긴 것이 생긴 경우에는 잘못된 글자 부분만 파내어 다른 나무를 박고 다시 새긴다.
한편 각종 궁궐의 건물이나 사찰·사가의 건축물에도 나무에 글자를 새려 현판(顯板)을 거는 일이 일반화 되어 대부분의 건축물에는 현판이 걸리게 되었다. 여기에 각을 하는 작업 역시 각자장의 일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 각자의 정교함이 매우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지만 목판 인쇄술을 대신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목판 인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이후 일제강점기 사진술과 새로운 인쇄술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목판 인쇄는 급속히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근래에 이르러서는 서양인쇄술의 도입으로 급속히 쇠퇴하여 건물의 현판이나 유명 서예가의 글씨를 새긴 판각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07호     누비장 (縷緋匠)

누비는 옷감의 보강과 보온을 위해 옷감의 겉감과 안감사이에 솜, 털, 닥종이 등을 넣거나 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안팎을 줄지어 규칙적으로 홈질하여 맞붙이는 바느질 방법이다. 우리나라의 누비는 면화재배 이후 적극적으로 활성화되었으며 조선시대의 다양한 실물자료들이 전해지고 있다. 승려들이 일상복으로 입는 납의(衲衣)는 헤진 옷을 수십 년 동안 기워 입은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점차 누비기법으로 발전하여 방한과 내구성, 실용성 등이 뛰어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누비는 누비 간격이나 바느질 땀수에 따라 세누비·잔누비·중누비 등으로 나뉘며, 형태에 따라 오목누비·볼록누비·납작누비로 크게 구분된다. 누비 간격은 잔누비 0.3㎝, 세누비 0.5㎝, 중누비 1.0㎝ 이상으로 구분된다. 세누비·잔누비 중에서도 옷감 2겹만을 누벼주어 겉모양이 오목오목하면 오목누비라 하고, 솜을 여유있게 두고 누벼주어 겉모양이 볼록한 입체적인 효과를 나타내면 볼록누비라 한다. 또 얇은 솜을 두거나 닥종이를 이용하기도 하고 옷감만으로 누벼주어 평면적이면 납작누비라 구분하였다. 누비용구로는 옷감재질과 동일한 실, 누비 두께에 따른 다양한 바늘 종류, 가위, 인두, 밀대, 자, 골무 등이 있다. 누비 바느질 기법은 홈질이 대부분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박음질도 사용된다. 의복이나 침구류에는 규칙적인 직선누비가 주로 사용되었으나 주머니나 보자기류에는 누비 자체를 문양으로 살려 곡선과 직선으로 조화를 이룬 것도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 손누비는 세계 유일한 재봉법으로 그 정교함과 작품성이 자수를 능가하는 예술품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나, 지금에 와서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라져가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木彫刻匠)

목조각은 목재를 소재로 나무가 가진 양감과 질감을 표현하는 조각이다. 목조각의 재료로는 결이 아름답고 견실한 오동나무, 소나무, 전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등이 많이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때 불교가 전해지면서부터 사찰 건축과 불상 등 불교 의식과 관련된 조각들이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거나 분실되어 전하는 것은 많지 않다.
목조각의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잘 건조된 목재 위에 밑그림을 그린 뒤 목재의 필요 없는 부분을 쳐내는데 이것을 걷목이라고 한다. 걷목으로 대충의 행태가 드러나면 불상의 속을 걷어 내는데 이것을 건조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갈라짐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며, 종교적으로 복장을 넣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점차 세부 조각을 한 뒤 옻칠과 채색하여 완성한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09호     화각장 (華角匠)

화각(華角)은 쇠뿔을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판을 말하며, 이것을 이용해서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을 화각장이라 한다. 화각공예는 재료가 귀하고 공정이 까다로와서 생산이 많지 않았으므로 특수 귀족층들의 기호품이나 애장품에 주로 이용되었다.
화각공예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 나전칠기인 경함(經函)과 염주합(念珠盒)에는 복채기법으로 된 대모(玳瑁)가 나전과 같이 사용되었고, 이러한 기법은 조선 전기와 중기의 나전에까지 이어졌으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화각으로만 장식한 화각공예품이 발달하였다.
화각공예는 투명도가 높은 쇠뿔을 종잇장처럼 얇게 편 다음 뒷면에 오색찬란한 단청안료로 갖가지 문양을 그리고 채색하여, 나무 등으로 만든 각종 기물인 백골(白骨) 위에 붙이고 백골의 내부와 뼈대 등 화각 이외의 여백은 옻칠을 하여 마감하는 기법이다. 화각공예품으로는 장·농·사방탁자·문갑과 같은 가구류와 작은 예물함, 경대, 필통, 화약통, 바느질자, 경상(經床), 연상(硯床), 반짇고리, 부채, 붓대 등이 있다.
화각공예는 색채 및 문양에서 장식성이 뛰어난 실용공예로서 우리나라의 전통공예, 특히 목공예 가운데에서도 매우 특색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장 (輪圖匠)

윤도장(輪圖匠)은 24방위를 원으로 그려 넣은 풍수 지남침(指南針)을 제작하는 장인이다. 윤도는 남북방향을 가리키는 자석바늘을 이용하여 지관이 풍수(집터 또는 묘자리를 정함)를 알아볼 때나 천문과 여행분야에서 사용되는 필수도구이다. 명칭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문헌에 처음 나오고, 일명 나침반, 지남철, 지남반, 패철이라고도 한다.
지남침의 원리는 중국에서 이미 한대(漢代)에 실용화되어 점을 치는데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풍수지남침이 신라 후기부터 발달하였고, 고려 전기에는 풍수음양지리와 연결되어 땅의 형세를 보는 풍수가나 지관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구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부터는 풍수가의 전용물에서 벗어나 여행자들도 사용하였으며, 특히 천문학자들에게는 휴대용 해시계에 정확한 남북을 가리키는 자오선을 정하는데 필수적이었다.
윤도는 중심의 지남침을 둘러싸고 24방위를 기본으로 하는 방위명들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는 음양·오행·팔괘·십간·십이지가 들어 있다. 방위명 자체는 팔괘·십간·십이지가 조합되어 이루어져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1호     사직대제 (社稷大祭) 

사직대제는 땅과 곡식의 신에게 드리는 국가적인 제사로, 사(社)는 땅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나라를 세우면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이와 함께 땅과 곡식의 신에게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풍요를 기원하는 사직제를 올렸다.
삼국시대부터 행해진 사직에 대한 제사는 자연에 감사하는 우리 조상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조선의 태조는 나라를 세우면서 궁궐과 함께 종묘, 사직단(사적 제121호)을 마련하여 경복궁의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도 사직단을 세워 백성의 편안함과 풍년을 기원하였다.
사직단은 동서로 사단((社壇:태사신과 후토신)과 직단(稷壇:태직신과 후직신)을 배치하였다. 태사(太社)와 태직(太稷) 신위는 단상 남쪽에 북향하고, 후토(后土) 신은 태사신위의 왼쪽에, 후직(后稷) 신위는 태직신의 왼쪽에 모두 동향하여 설치한다. 제사는 보통 2월과 8월에 지내고, 나라의 큰일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절차나 격식은 때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왔으나 점차 중국의 방식을 모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예를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제사의식은 소·돼지·양의 생고기를 비롯한 각종 곡식을 마련하고, 영신·전폐·진찬·초헌례·아헌례·종헌례·음복례·철변두·송신·망료(망예)의 순서로 진행된다.
사직제에 사용되는 음악, 무용, 음식, 의복, 의기(儀器) 등을 비롯하여 제사를 행하는 우리 고유의 제사절차 등은 전통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직대제는 고종 31년(1894)에 이르러 신관제(新官制)로 바뀌었고, 순종 2년(1908) 일본의 강압에 의해 폐해졌다. 이후 1988년 10월 종묘제례의 보유자였던 故이은표의 고증을 통해 복원하여 봉행되어 왔다.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내에 있는 사직대제봉행위원회에서 사직대제를 보존·계승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 (鑄鐵匠) 

주철장이란 인류가 오랫동안 사용하였던 쇠를 녹여서 각종 기물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주조물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6세기∼5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문헌 자료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쇠가 생산되고 매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인류문명 발달에서 쇠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므로 고대부터 쇠를 이용하여 필요한 물품을 만드는 기술과 장인은 국가적인 관심사였다. 또한 한반도에 불교가 정착되면서 사찰이 건립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많은 범종이 제작되었다. 이처럼 쇠를 녹여서 범종을 비롯한 각종 쇠제품을 만드는 장인을 주철장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범종의 특징은 세부의 장식이 정교하고 울림소리가 웅장하여 동양권의 종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나다. 형태는 항아리를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며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와 대롱 형태의 용통이 부착되어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종은 통일신라시대인 725년에 제작된 오대산 상원사 동종이다. 또한 그 크기와 미적인 면에서는 성덕대왕신종을 들 수 있다.
범종의 제작 기법으로는 밀랍으로 주조하는 방식이 있으며, 이것이 전통적인 종 제작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기법은 중국 문헌인 『천공개물』에 간단히 소개되어 있을 뿐 그 맥이 오래 전에 끊기게 되었다.
재료는 종의 크기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동 80%, 주석 17%로 합금하며, 밀랍제조의 경우 밀랍에 소기름을 기본적으로는 8:2로 혼합하되, 그 배합 비율은 기후에 따라 다르다.
범종 제작 방법은 종의 크기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벽돌을 쌓은 다음 이 벽돌에 고령토, 점토를 혼합하여 종의 형태로 만든다. 그 다음에 표면을 손질하고 물에 갠 흑연가루로 마무리를 한다. 다음으로는 밀랍으로 종의 모형을 제작하고 여기에 주물사를 밀랍 표면에 두 번을 바른다. 이후 밀랍을 녹여서 내고 제작된 외형을 내형에 조립하여 주조함으로써 종을 완성한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3호     칠장 (漆匠) 

칠장은 옻나무에서 채취하는 수액을 용도에 맞게 정제하여 기물에 칠하는 장인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 옻이 사용된 흔적은 기원전 3세기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인 유물이 출토된 것은 기원전 1세기 경부터이다.
낙랑시대에 발전된 칠기는 신라시대에 들어서 더욱 발전하였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나전과 결합되어 나전칠기라는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칠이 이전 시기보다 대중화되어 많은 칠기가 제작되었다. 국가에서도 전국의 옻나무 산지를 파악하여 여기에서 생산되는 옻칠을 공납받았으며, 서울과 지방에는 칠과 관련된 장인들이 주로 관청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나무에서 채취한 칠은 정제 과정을 거쳐야만 용도에 맞게 활용이 가능하므로 칠장은 직접 칠을 정제하여 사용하였다. 칠은 정제를 통하여 옻액의 불순물 등을 제거하여 입자가 고운 칠로 변하게 된다. 그 방법은 생칠을 2∼3 시간 동안 고무레로 혼합하는 고무레질과 옻칠의 수분 합수율을 줄임으로써 붓자국 등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교반으로 나누어 진다.
칠공예품 칠은 완성되기까지 장시간이 필요하며 과정이 매우 복잡하다. 우선 칠을 하기 위한 기물이 필요한데, 이를 소지라고 한다. 소지 재료에는 가공하기 쉽고 칠 바름이 잘 되는 나무를 비롯한 대나무, 천, 종이, 흙, 금속 등을 사용한다.
칠하는 과정은 먼저 소지를 다듬은 후 생칠을 바르고 갈고 바르는 과정을 수차례한다. 그 후 다시 초칠, 중칠을 하며 건조시키고 다시 상칠을 한 후 광내기, 생칠을 반복적으로 하여 마감한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4호     염장 (簾匠)

염장(簾匠)이란 발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발의 재료에는 대나무(대나무발), 갈태(갈대발), 겨릅(겨릅발), 달풀(달발) 등이 사용된다. 전통가옥인 한옥에서의 생활에는 발이 필수품이었다. 발은 특히 여름철에 강한 햇볕을 막아주어 실내에 있는 사람에게는 시원함을 느끼게 해줄 뿐만 아니라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도록 하는 기능도 한다. 발은 가마의 문을 가리는 발에서부터 집의 문을 가리는 발까지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졌다. 시누대는 음력 11~12월 사이에 채취하는데 3년생이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개월간 햇볕과 이슬 맞히기를 반복한 시누대로 발을 엮는데 보통 만 번 이상의 손이 가야할 만큼 발 제작에는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染色匠)

염색장이란 천연염료로 옷감을 물들이는 장인을 말한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염색을 담당하는 전문적인 장인이 있었을 정도로 염색은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옷감을 물들이는데 사용하는 천연염료는 식물, 광물, 동물 등에서 채취한 원료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약간의 가공을 통해 만든 염료를 사용한다. 염색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 쪽염색은 쪽이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염료를 가지고 옷감 등을 물들이는 것으로 염색과정이 가장 어렵고 까다로우며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나주지역의 쪽염색 작업과정을 살펴보면 팔월 초순경 60~70㎝정도 자란 쪽을 베어 항아리에 넣고 삭힌다. 이틀 뒤 쪽물에 굴껍질을 구워 만든 석회를 넣으면 색소 앙금이 가라앉으면서 침전쪽이 생긴다. 침전쪽에 잿물을 넣고 다시 7~10일 동안 발효시키면 색소와 석회가 분리되면서 거품이 생기는데, 이 과정을 '꽃물 만들기'라고 하고 이것을 염료 물감으로 사용한다.
천연 염색은 근대화 이후 급속한 화학염색의 도입으로 인하여 전통이 끊겼으나 1970년대 이후 일부 장인들이 노력으로 그 맥을 살릴 수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 (靴鞋匠) 

화혜장(靴鞋匠)이란 전통 신을 만드는 장인으로, 조선시대 신목이 있는 신발인 화(靴)를 제작하는 ‘화장(靴匠)’과 신목이 없는 신발인 혜(鞋)를 제작하는 ‘혜장(鞋匠)’을 통칭한 것이다. 조선시대『경국대전』의하면 중앙관청에 소속된 화장은 16명, 혜장은 14명이었다고 한다. 이 기록을 통해 볼때 당시 신에 대한 수요가 많았으며, 그 기능도 분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혜(鞋)의 제작과정은 여러 겹의 광목이나 모시를 붙인 백비 위에 공단을 붙여 신울(발등을 감싸는 부분)을 준비하고 소가죽으로 신 밑창을 만든 뒤 신울과 밑창을 맞바느질하여 연결한다. 이때 중심이 틀어져 신코가 비뚤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나무로 된 신골을 박으면서 신의 형태를 잡아준다.
전통 신 제작은 가죽을 주재료로 하여 수십 번의 제작공정을 거쳐 이루어질 만큼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장인의 솜씨로 완성된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장인 및 신과 관련된 각종 문헌이 등장하며 이를 통해 당시 생활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화혜장은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제작기술에 대한 학술적 연구 가치도 크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된 황혜봉 보유자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국가무형문화재 화장(靴匠) 보유자 故 황한갑)의 문하에 입문한 이후 고조부 황종수, 증조부 황의섭, 증백조부 황인섭, 조부 황한갑, 부친 황등용으로 이어지는 화장(靴匠) 가문의 가업을 이어 40여 년 동안 전통신 제작을 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韓紙匠) 

'한지장(韓紙匠)'이란 전통한지를 제작하는 장인을 말한다. 한지는 닥나무와 황촉규(黃蜀葵)를 주재료 하여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장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아흔아홉 번의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람이 백번째로 만진다 하여 옛사람들은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한지는 고려시대부터 그 명성이 높아 중국인들도 제일 좋은 종이를 '고려지(高麗紙)'라 불렀다. 송나라 손목(孫穆)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고려의 닥종이는 빛이 희고 윤이 나서 사랑스러울 정도라고 극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종대부터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해 원료 조달과 종이의 규격화, 품질 개량을 위해 국가에서 관심을 갖고 관리해오다가 근·현대를 지나오면서 건축양식과 주거환경의 변화, 서양지의 수입으로 전통적인 한지의 명맥은 거의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도 한지제작은 생산원가와 제작공정의 편의로 닥나무 껍질 대신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수입한 펄프를 사용하기도 하고, 황촉규 대신 화학약품인 팜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문화재청에서는 전통한지의 올바른 보존과 전승을 위해 한지장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 (佛畵匠)

불화(佛畵)불탑(佛塔), 불상(佛像) 등과 함께 불교의 신앙 대상으로, 제작 형태에 따라 탱화[幀畵], 경화(經畵), 벽화(壁畵)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특히 탱화는 복장식(服裝式), 점안식(點眼式) 등의 신앙 의식 절차를 거쳐 불단(佛壇)의 주요 신앙대상물로 봉안된다. 우리나라 전통사찰에 전해오는 탱화는 불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불화 제작을 담당하는 장인을 특별히 금어(金魚), 화승(畵僧), 화사(畵師), 화원(畵員)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단청과 불화는 제작 목적과 표현방법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단청은 궁궐·사찰·사원 등의 건축물 벽면에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문양과 그림을 그려 장엄하는 반면, 불화는 불교 교리를 알기 쉽게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예배용·교화용 탱화 제작을 주로 하고 있다. 또한 현재 전승현장에서도 단청과 불화는 각각의 고유한 기술과 역할을 바탕으로 분리 전승되고 있다. 그동안 불화 제작기능은 단청장(丹靑匠, 1972년 지정) 보유자에 의해 전승되어 왔으나 종목의 특성을 고려해 단일종목으로 분리하여 불화장(佛畵匠)으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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